[만물상] ‘서울 된 평양’
ahn-yonghyun 기자페이지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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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당 회의에서 “동계올림픽이 다음 달 ‘평양’에서 열린다”고 했다. 옆자리 원내대표가 “평창, 평창”이라고 알려주자 “아, 평창”이라고 바로잡았다. 당시 태극기 없는 개회식 등 평양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평창의 스포츠 정신을 압도하면서 ‘평양 올림픽’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많았다. 머릿속이 어떤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면 말실수도 나오기 쉽다.
'서울 된 평양'
▶그해 9월 국방부는 남북 군사 합의에서 “서해 완충 수역이 남측 40㎞, 북측 40㎞씩 총 80㎞”라고 발표했다. 해상 포 사격 등을 중단하기로 한 구역이 “남북 동등하다”는 말도 했다. 그런데 구글 지도로 재보니 북측은 50㎞, 남측은 85㎞였다. 총 80㎞가 아니라 135㎞였고 우리가 35㎞를 더 내준 합의였다. 거짓말 논란이 일자 국방부는 “실무자 실수”라고 했다. 한 치가 중요한 군비 통제 구역을 협상하면서 어떻게 거리를 ‘실수’로 틀리나.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은 북이 쏜 미사일을 “단도미사일”이라고 했다. 처음엔 ‘탄도미사일’이라고 말한 줄 알았다. 탄도미사일이면 북한의 유엔 결의 위반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자 청와대는 “대통령이 ‘제가 그랬나요. 단거리 미사일이죠’라고 답했다”는 내용까지 공개했다. ‘단거리’를 ‘단도’로 잘못 말할 수 있는지를 떠나 무슨 코미디 같다. 문체부는 대통령 발언을 전하며 ‘올바르게’를 북한식 표기법인 ‘옳바르게’로 적기도 했다. 보훈처는 현충일 추념식에 천안함·연평도 유족을 빼놓고 “직원 실수”라고 했다. 실수로 세월호 추모식에 세월호 유족을 안 부를 수도 있나.
▶이번엔 문 대통령이 주재한 ‘P4G 서울 정상 회의’ 개막식 영상에 서울 아닌 평양 위성사진이 들어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동강 능라도를 시작으로 평양, 평안도, 한반도 순으로 줌아웃되는 영상이다. 평양을 개최지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번에도 정부는 “외주 제작사의 단순 실수”라고 해명했다.
▶이번 서울 행사는 우리나라가 개최한 첫 환경 분야 정상 회의로, 청와대가 각별한 관심을 갖고 준비해왔다. 탁현민 비서관이 라디오에서 두 번이나 행사 홍보를 했다. 청와대도, 정부도 전 세계에 생중계하는 개막식 영상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동네 음식점도 홍보 영상을 만들면 위치가 맞는지부터 챙길 것이다. 그러니 인터넷에서 “실수 아닐 것”이란 댓글이 쏟아지는 것이다. 평양이 아니라 도쿄 영상이 들어갔다면 이 정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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