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301] 금강굴과 빨치산 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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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 개운동 출신의 개운조사(開雲祖師·1790~?)는 아직까지 살아 있는 신선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1790년이면 다산 정약용이 기중기 만들던 시절이다. 개운조사가 아직 살아 있다고 믿는 추종자들인 속칭 ‘개운조사파’의 숫자도 대략 500명은 되지 않나 싶다.
개운조사가 남긴 저서도 있다. ‘유가심인능엄경(瑜伽心印楞嚴經)’이 그것이다. 항복기심(降伏其心)을 하고, 대력백우(大力白牛)를 잡아야 한다는 게 요체이다. 나는 그동안 개운조사 유적지를 추적해 왔다. 상주 우복동 근처의 바위에 개운조사가 손가락으로 새겼다고 하는 ‘동천(洞天)’바위, 개운조사가 수도했다는 문경 봉암사 내의 암자에도 가고, 개소리 닭소리가 안 들린다는 수도처인 심원사도 가 보았다.
지난주에 지리산을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는 등산대장 김중호(60)의 안내를 받아서 반야봉 바로 아래에 있는 해발 1500미터 높이의 개운조사 수도처 묘향대(妙香臺)를 답사하였다. 이 터는 고지대인데도 불구하고 천왕봉을 비롯한 지리산의 고봉들이 3중으로 둘러싼 명당이었다. “기왕에 온 김에 유명한 빨치산 비트를 하나 볼래요? 박영발 비트가 여기서 20분만 내려가면 있습니다.” “신선을 추적하는 사람에게 팔자 사나운 빨치산 비트가 뭐요!” “빨치산 총대장 이현상이 1953년에 죽었지만 박영발은 그 이후에도 4~5개월을 더 버티면서 저항했습니다. 그가 토벌대의 수색에도 발각되지 않고 숨어 있었던 비트가 있는데, 아주 찾기 어려운 바위굴입니다.”
폭포수골 아래로 내려가 보니 바위 절벽 중간쯤에 그 박영발 비트가 있었다. 절벽 중간의 틈새에서 3미터쯤 밧줄을 타고 내려가다 다시 4m쯤 높이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만 하였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정면이 아니고 오른쪽에 겨우 기어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있다. 구멍 안으로 3~4명이 앉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다시 바위 틈새로 기어 들어가면 2-3명이 설 수는 없고 간신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굴이 있었다. 사람은 물론이고 호랑이도 찿기 어려운 지점에 있는 바위 굴이었다. 다락방 같은 구조의 이 굴은 특이하게도 습기가 없어서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는 이 굴을 보면서 ‘여기가 혹시 금강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개운조사가 수도한 금강굴은 반야봉 아래에 있다고는 했지만 그동안 추종자들이 도저히 찾을 수 없었는데, 박영발 비트가 바로 ‘금강굴’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신선과 빨치산이 같은 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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