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젓가락으로 과자 집어먹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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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과업체에서 최근 신제품 ‘고추칩’을 내놨다. 과자 봉지에는 손가락 대신 젓가락으로 과자를 집는 사진을 썼다. 업체 관계자는 “고추튀김 맛을 본뜬 과자라 젓가락 사진을 썼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동안의 손가락 논란을 의식 안 한 건 아니다.”
일러스트=김도원
▶무심코 손가락을 놀리면 밥줄이 위험해지는 세상이다. 지난 5월, 편의점 체인 GS25 홍보 포스터에 손가락으로 소시지를 잡는 모습의 삽화가 들어갔다. “한국 남성의 생식기 크기를 조롱하는 메갈(극단적 페미니스트)의 심볼”이라며 일부 남성들이 불매 운동을 선언했다. 편의점주들까지 난리가 났다. 디자이너가 “저는 결혼해 아들 키우는 워킹맘”이라고 해명했다. 결국 그를 포함 여럿이 징계, 보직 해임됐다. 경찰청이 내놓은 ‘PM(개인형 이동 장치) 개정법령’ 안내 포스터에도 그 ‘엄지검지’ 손동작이 들어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경찰청은 “의도는 없었지만 불편 드려 죄송하다”며 포스터를 수정했다. ‘엄지검지 손동작’은 한국에서만 ‘남혐 인증’ 수신호가 됐다.
▶손가락 논란은 ‘일베 인증 논란’이 원조다. 사이트 초기에 열혈 이용자들이 손가락으로 ㅇ(일) ㅂ(베) 모양을 만든 후 사진을 찍는 ‘회원 인증’ 놀이가 유행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이런 일베 회원 인증 사진을 역으로 이용해 ‘일베 회원 색출’에 활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연기력으로 칭찬받는 배우도 몇 년 전 이런 사진이 나와 배우 인생이 끝날 뻔했다. “좋아하는 미국 힙합 가수를 따라 했다”고 했지만, 공격하는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판을 잘못 두드려도 두들겨 맞는다. 의성어를 연상시키는 ‘쿵쾅이’는 ‘뚱뚱하고 못생긴 페미니스트’, ‘오또케' ‘아몰랑’은 ‘의존적’ ‘비논리적' 여성을 칭하는 여성 비하 용어다. 남성이 생각 없이 먹는다는 뜻의 ‘허버허버’, 쓸데없이 정자 수만 많다는 뜻의 ‘오조오억개’라는 표현은 남성들을 분노케 하는 단어다. 문자에 답 없는 딸에게 “우리 딸래미 아몰랑?”, 밥 먹는 아들에게 “우리 아들 허버허버 잘 먹네” 하면 화낸다.
▶”그런 뜻인지 몰랐다” “그런 의미 아니었다”고 해명하면 “무의식이라 더 문제”라고 역공당하는 세상이다. 일베로 오인받기 싫으면 ‘일베 박사’가 돼야 한다. ‘남혐, 여혐 단어를 썼다’는 애먼 누명을 피하려면 남혐, 여혐 단어를 통째로 외워야 할 지경이다. 역설이고 패러독스다. 좌우, 젠더 갈등이 격화되며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 의심증 환자가 된 것 같다. 의심과 불안의 구름이 사이버 세상을 넘어 실제 사회로까지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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