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영구 집권을 꿈꾼다...권력을 놓치면 처형되니까
[송재윤의 슬픈 중국]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1794년 7월 파리 혁명광장에서 거행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의 처형식 /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28회>
혁명은 도박이다. 성공 확률은 낮지만, 승자는 모든 권력을 독식한다. 도박꾼은 일확천금을 노린다. 혁명가는 정권의 획득을 꿈꾼다. 모든 도박꾼이 혁명가는 아니지만, 모든 혁명가는 도박 근성이 있다. 집권한 혁명가는 권력을 담보로 더 대담한 도박을 한다. 20세기 모든 사회주의 혁명이 테러정치로 귀결된 까닭이다. 유토피아의 환상에 사회의 모든 재원과 인력을 걸었다가 다 날렸기 때문이다. 거듭되는 정책 실패로 정치 밑천을 탕진한 후에도 혁명가는 영구집권을 꿈꾼다. 권력을 놓치는 순간, 스스로 “자코뱅의 단두대”를 피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문화혁명, 권력 탈취하는 정치투쟁
사회학적으로 혁명은 단기간의 광범위한 급진적 변화를 의미한다. 경제체제의 급속한 전환, 사회구조의 과격한 변동, 정치권력의 파격적 교체 등은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문화혁명은 경제적 퇴보와 사회적 혼란을 초래했음에도 정치권력의 파격적 교체라는 점에선 가히 혁명적이었다. 당시의 표현을 빌면, 문혁은 탈권(奪權, 권력탈취)의 정치투쟁이었다.
1965년 11월 초부터 1966년 7월까지 마오쩌둥은 베이징 중앙권력의 탈취에 성공했다. 국가주석 류샤오치가 이끌던 중공중앙 정치국 상임위는 권위를 잃었다. 덩샤오핑이 지휘하던 중앙서기처는 기능을 멈췄다. 대신 중앙문혁소조가 중앙정치를 움직였는데, 중앙정부 내에 급작스레 설립된 마오 개인의 사조직과 같았다.
<1966년 9월 15일 톈안먼 성루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선 중앙문혁소조의 성원들. 왼쪽부터 장춘차오, 창칭, 저우언라이, 야원위안, 마오쩌둥, 치번위, 왕리, 관펑, 무신(穆欣, 1920-2010) / 공공부문>
1940년대 이래 비밀정보 및 정찰 업무를 도맡아 온 캉성, 문예선동의 대모(代母) 장칭, 문혁 3대의 어용문필가 왕리, 관펑, 치번위, 상하이 주재 좌익평론가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 등이 중앙문혁소조의 핵심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행정적 실무능력이나 분야별 전문성보다는 그저 권력투쟁과 선전선동에 능했던 이념과잉의 투사들이었다. 명나라 말기 황제를 업고 국정을 농단했던 동창(東廠)의 환관들과 닮았다 할까.
마오는 이들을 이목(耳目)으로 삼고 수족으로 부렸지만, 그의 실권은 총구에서 나왔다. 당시 마오는 군부를 온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어디로든 군대를 파견할 수 있었기에 그의 절대 권위가 유지됐다. 적어도 1966년 말까지 그는 스스로 군을 그렇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듯하다.
마오쩌둥 “전국의 전면적 계급투쟁을 위하여 건배!”
1966년 12월 26일 74세 생일을 맞아 마오는 중난하이(中南海)의 관저에 일곱 명을 초대했다. 모두 중앙문혁소조의 핵심멤버들이었다. 식사 때 마오가 말했다. “중국현대사를 보면, 혁명운동은 모두 학생운동에서 시작됐지만, 노동자, 농민, 혁명적 지식분자를 통해서만 성과를 냈어. 이건 객관적 법칙이야. 5.4운동도 그랬어. 문화혁명도 마찬가지야. 자, 전국의 전면적 계급투쟁을 위하여! 건배!” 아마도 이때 쯤 마오는 스스로의 중앙권력 장악을 확신했던 듯하다. 그러한 확신 위에서 마오는 무산계급을 향해 미증유의 “천하대란”을 일으키라 요구했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전면 승리 만세!” 1966년 8월 초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을 작성한다. 마오의 대자보는 이후 문화혁명의 탈권 투쟁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가 됐다. 여기서 “사령부”란 중공정부 내부의 당권파들의 지휘본부를 가리킨다./ 공공부문>
1966년 8월부터 12월까지 넉 달 동안 베이징에서 시작된 문혁의 돌풍은 바야흐로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베이징의 중앙 일간지들은 날마다 문혁의 현황을 보도하며 혁명의 구호로 군중을 선동하고 있었다. 공적 매체를 통해 날마다 반복되는 문혁의 선동은 대(對)인민 총동원령의 효과를 발휘했다.
그해 8월부터 11월 말까지 마오쩌둥은 8차례에 걸쳐 매번 100만 이상, 심지어는 250만이 모였다는 홍위병 집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합 최대 1300만의 홍위병들이 전국 각지에서 수도 베이징으로 모여들었다. 이른바 대천련(大串聯, 직렬연결)의 드라마였다.
전국의 홍위병들은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는 물론, 옌안(延安), 징강산(井岡山) 등 혁명의 성지를 순례하며 혁명정신을 벼렸는데······. 뇌막염 등 전염병이 돌기 시작해 11월 경 절정에 이르렀다. 항생제 부족 때문에 정부는 서유럽의 제약회사에서 대량의 치료제를 급매했지만, 이듬해 2월까지 무려 16만 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마오에게 그 정도 사태는 작은 에피소드일 뿐이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문혁의 전면적 확산에 쏠려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상하이가 문혁의 중심이 돼야 했고, 학생들 대신 노동자가 전면에 나설 때가 됐다.
<1966년 가을 쓰촨성에서 상경한 세 명의 “혁명 소장(小將)”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직접 마오쩌둥을 접견한 후 그 순간의 감동을 일기장에 기록하는 모습/ 공공부문>
베이징 홍위병, 상하이를 흔들다!
교통의 요충지 상하이는 전국 최대의 공업도시이자 소비도시였다. 당연히 상하이는 홍위병의 집결지가 됐다. 1966년 12월 12일의 통계에 따르면, 석 달 동안 403만 5천 명 이상의 외지 혁명분자들이 상하이를 방문했다.
1966년 8월부터 베이징의 홍위병들은 세 차례에 걸쳐서 상하이로 “남하(南下)”했다. 그들은 이미 베이징에서 1772명이 학살당하는 홍팔월의 광기를 체험한 후였다. 마오의 말대로 혁명이란 “한 계급이 무력으로 다른 계급을 전복하는 폭동”이었다. 그들은 그 생생한 혁명의 체험을 상하이의 천진난만한 홍위병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1966년 8월 26일, 상하이 시장 차오디츄(曹荻秋, 1909-1976)는 홍팔월의 대학살에 대해 듣고 있었다. 중앙정부가 백주의 집단학살을 수수방관한 사실에 분개하면서 그는 중공 상하이 시위원회(이후 상하이 시위)의 간부들에게 베이징 홍위병에 대한 공세적 대응을 주문했다. 그의 예상대로 베이징 홍위병들은 곧 상하이 시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상하이 시민들 중 일부는 그런 베이징 홍위병에 적의를 표출했지만, 현지의 홍위병은 베이징의 홍위병에 동조하고 나섰다. 무엇보다 베이징 홍위병들은 상하이의 노동자들에게 문혁의 바통을 전했다. 문혁 10년사의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1966년 말 상하이 조반파의 투쟁 현장을 묘사한 포스터. 홍위병의 깃발과 나란히 “상하이 공인 혁명조반대”와 “상하이 농민 혁명조반대”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학생운동이 노동운동과 결합돼서 전면적 “계급투쟁”으로 확산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https://www.shobserver.com/news/detail?id=688>
인민의 권력 탈취, 마오를 위한 것이었을 뿐
상하이 “공인(工人, 노동자) 혁명조반 총사령부”(이하 공총사[工總司])가 대표적이었다. 공총사는 전국 최초로 생겨난 최대 규모의 노동자 조반파 조직이었다. 1966년 11월 6일 30명의 대표단이 모여 발족한 공총사는 상하이 국면(國棉) 17공장의 보건위생과 간사 왕홍원(王洪文, 1935-1992)의 리더십 아래서 상하이시 전체의 대규모 노동자 혁명조직으로 급성장했다. 왕홍원은 이후 중국공산당 서열 3위 중공부주석의 지위에 올라 맹위를 떨쳤다. 그는 “4인방”의 막내였다.
발족 직후 공총사는 합법성을 인정하라며 상하이 시위를 압박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11월 10일 공총사 소속의 수만 명 노동자들은 기차를 탈취해 베이징으로 북상하는 극적인 시위 장면을 연출한다. 두 시간 정도 북상하던 기차는 중앙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 북부의 안팅(安亭)역에 멈춰 선다. 기차에서 내린 노동자들은 철로에 드러누워 시위를 이어간다. 상하이 철로 교통이 마비되자 중앙문혁소조는 장춘차오를 급파해 노동자 대표와 담판을 벌인다. 담판의 결과는 공총사의 합법화였다.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상하이로 돌아간 공총사의 노동자들은 이제 본격적인 권력탈취의 투쟁에 나선다. 마오쩌둥의 지지를 확신한 노동자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1967년 1월 초 공총사는 상하이의 주요 언론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1967년 1월 6일, 상하이 시위를 점령한 후, 공총사는 “상하이 인민공사”의 성립을 선언한다. 인민공사란 코뮌(commune)을 의미한다. 인민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도시의 권력을 탈취했다는 점에서 "상하이 인민공사'의 성립은 1871년 파리코뮌을 연상시켰다. 물론 둘 사이엔 결정적 차이점이 있었다. 파리코뮌과는 달리 상하이 인민공사는 절대 권력자 마오의 지지를 받는, 마오를 위한, 마오의 호위조직이었다. <계속>
<1967년 1월 공총사는 상하이 시장, 부시장을 모두 축출하고 상하이 시위 각급 기관의 권력을 탈취 한다. 2월 5일, 공총사는 “상하이 인민공사”라는 이름으로 상하이의 신정권을 창출하지만, 2월 23일 마오쩌둥의 제안에 따라 “상하이시 혁명위원회”로 개명한다. 이후 중국의 각지에선 조반파들이 다양한 명칭의 임시정부를 세우게 된다. 위의 사진은 1967년 2월 상하이의 혁명군중이 시정부를 에워싸고 상하이인민공사의 성립을 선포하는 장면/ 공공부문>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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