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미 대통령이 보낸 쿠싱, 4만 달러로 청 관리들 회유

bindol 2021. 8. 3. 02:58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8〉

중국 화가가 제자의 진료를 지도하는 파커의 모습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19세기 30년대 중국은 아편천국이었다. 광둥(廣東)이 특히 심했다. 열 명 중 네 명이 아편 중독자였다. 고관은 물론, 상인, 군인, 승려, 부녀자 할 것 없이 아편에 취했다. 아편 구입하기 위해 사창가로 출근하는 젊은 며느리가 있는가 하면, 도둑질에 입문한 교사도 부지기수였다. 청나라 정부도 팔짱만 끼고 있지 않았다. 1821년부터 35년까지 40여 차례 아편무역 금지령을 내렸다. 법은 권위를 잃은 지 오래였다. 매년 5000상자였던 아편무역이 200파운드짜리 7만 상자로 늘어났다. 은 1000만 냥이 해마다 영국으로 유출됐다.
 

1844년 6월 중순 미·청 회담 개시
미, 영국과 동등한 경제관계 요구
영보다 특권 많은 ‘쿠싱조약’ 체결

24년 후 청과 정식 외교관계 수립
워싱턴·베이징에 양국 관리 파견

1830년대 청은 영국 아편의 천국
 

베이징에 부임하기 전 워싱턴의 중국공사관을 방문한 벌링게임. [사진 김명호]

황제가 총독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한 명이 이런 제안을 했다. “영국인들은 차(茶)를 즐긴다. 중국은 도처에 차 밭이 널려있다. 아편과 물물교환하자.” 아편을 재배하자는 총독도 있었다. “중국 농부들이 종식(種植)한 아편은 질이 좋고 저렴하다. 영국이 인도에서 들여온 것과 경쟁시키자.” 한 총독은 합법화를 제안했다. 황제는 단호했다. “아편무역을 금지시켜라. 전국에 만연할 경우, 재정 손실과 가정 파괴에 이어 나라가 망한다.” 아편 흡연자를 사형시키자는 제의에 관심을 표하자 한 신하가 제동을 걸었다. “난세일수록 법 적용에 신중해야 한다. 조정에도 형장에 끌려가야 할 사람이 많다.” 잠자코 있던 린쩌쉬(林則徐·임칙서)가 입을 열었다. “지금 아편을 근절시키지 못하면 수년 안에 국고가 바닥이 난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중국은 지대물박(地大物博), 땅 넓고 물산이 풍부한 대국이다. 아무리 대국이라도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지 못하면 나라 축에 끼지 못한다. 군인들 중에 아편 중독자가 많다. 망할 징조다.”
 
황제는 린쩌쉬의 손을 들어줬다. 린과 장시간 대책을 숙의했다. 7일간 토론을 거쳐 최종 명령을 내렸다. “네게 금연대신(禁煙大臣)과 흠차대신(欽差大臣)을 명한다. 나 대신 광저우(廣州) 수군사령부를 동원해 아편을 근절시켜라. 아편을 소장한 중국인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해라.” 1839년 2월 초, 린쩌쉬는 베이징을 뒤로했다. 3월 10일 광저우에 도착한 린은 아편흡입소에 못질을 하고 무역 중심지 13항(十三行)을 봉쇄했다. 영국 상인들은 13항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했다. 18일 만에 아편 2만 상자를 내놓고 백기를 들었다. 린은 몰수한 아편에 불을 질렀다. 다 소각하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이 사건은 1차 아편전쟁의 도화선이었다. 영국군 1만2000명이 청나라군 수십만을 농락했다.
 
린쩌쉬의 조수였던 리츠샹(李致祥·이치상)의 손자가 선대에게 들은 내용을 구술로 남겼다. “아편전쟁 당시, 13항에는 300여 명의 외국 상인이 있었다. 대부분이 영국인이고, 미국인은 30명이 채 안 됐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국적은 다섯 손가락 내외였다. 생활용품만 취급하던 미국 상인들도 시간이 흐르자 아편무역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행패가 영국인들보다 덜하지 않았다.” 파커의 선행도 빠뜨리지 않았다. “파커는 상인이 아니었다. 1834년 광저우에 첫발을 디딘 미국인 안과의사였다. 환자가 있으면 어디건 달려가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대포가 아닌 수술용 칼로 기독교를 전파했다. 중국인 제자 양성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왕샤조약의 주역 칼렙쿠싱. [사진 김명호]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중국을 압박했다. 대포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한 중국은 난징(南京)에서 영국이 내민 문서에 군말 없이 서명했다. 난징조약은 영국에 온갖 혜택을 부여한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린쩌쉬의 금연운동으로 손해를 본 미국도 중국을 좌시하지 않았다. 칼렙쿠싱을 중국 주재 판무관에 임명했다. 쿠싱은 간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13세 어린 나이에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모교에서 교수 생활하다 1년 만에 걷어치우고 변호사 자격을 땄다. 결혼도 일찍 했다. 대법관의 딸과 22세 때 가정을 꾸렸다. 장인이 “법관은 남 뒤치다꺼리나 하는 개떡 같은 직업”이라며 정계 투신을 권했다. 쿠싱은 선거에 나가는 족족 당선됐다. 금슬도 유별났다. 부인이 죽자 여자 근처엔 가지도 않았다.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대통령 존 타일러는쿠싱의 능력을 높이 샀다. 재무장관에 임명했지만 의회에서 부결당하자 중국으로 파견했다. 노대국과 새로운 경제관계를 틀 사람은 쿠싱 외에는 없었다.
 
쿠싱, 13세에 하버드 대학 들어가
 
공작금 4만 달러를 들고 중국에 온 쿠싱은 2개월간 청나라 관리들을 구워삶았다. 1844년 6월 중순, 마카오 인근 왕샤(望厦)에서 흠차대신 치잉(耆英·기영)과 회담을 시작했다. 쿠싱은 담판의 고수였다. 2주간 영국과 동등한 경제관계 수립을 요구하며 치잉을 어르고 달래며 겁줬다. 치잉은쿠싱의 압력에 굴복했다. 명분이 그럴듯했다. “성인은 일시동인(一視同仁),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한다.” 광저우 하나였던 개항장을 5곳으로 늘리고 병원과 교회 설립도 허락했다.
 

중국의 초대 주미공사 천란빈. [사진 김명호]

왕샤조약(미국측에선 쿠싱조약)을 계기로 미국은 영국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렸다. 여유가 생긴 미국은 무력 대신 외교를 택했다. 중국과 정식 외교관계 수립을 추진했다. 왕샤조약 체결 24년 후, 미국 대통령 링컨은 친구 벌링게임을, 중국은 병부시랑 천란빈(陳蘭彬·진란빈)을 각각 베이징과 워싱턴에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미·중 관계에 훈풍이 불 징조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