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미 록펠러재단 거금 지원 덕에 ‘베이징원인’ 발견

bindol 2021. 8. 3. 03:07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6〉

1925년 3월 19일, 국부 쑨원의 출상(出喪)을 배웅하기 위해 협화병원 문전에 운집한 학생들. [사진 김명호]

중국공산당 창당 2개월 후인 1921년 9월 19일 오전, 록펠러재단이 설립한 협화의학원(協和醫學院)과 협화의원 낙성식이 열렸다. 바다에서 1개월을 보내며 베이징에 온 록펠러 2세의 연설은 간단했다. “중국인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왔다. 서구의 의학과 과학이 중국인의 정신세계와 사유에 보탬이 되기를 고대한다.” 식전에 참석한 베이징대학 교수 후스(胡適·호적)는 감동했다. 일기에 이런 내용을 남겼다. “엄숙한 전례(典禮)였다. 100명이 넘는 서구 유명 대학의 학위복 대열이 장관이었다. 록씨의 연설도 좋았다.”
 

중 교육에 30여 년간 8억 달러 투자
협화의학원과 13개 대학 발전 지원
1930년대 동양 최고 종합병원 육성

하늘이 준 명약으로 불린 용골 산지
저우커우덴 유적지 발굴 전폭 후원
화석인류 ‘베이징원인’ 발견 성과

록펠러 2세, 협화의학원 낙성식 참석
 

1910년대, 저우커우덴의 용골산. [사진 김명호]

록펠러재단은 1916년부터 47년까지 중국의 의학과 자연과학, 고고학, 향촌 건설, 평민교육, 학자 교류 등에 8억 달러를 투입했다. 그중 4465만 달러가 협화의학원과 협화의원 몫이었다. 협화의학원은 예과 3년에 본과 5년이었다. 예과 교육은 다른 대학에 위탁했다. 당시 중국에는 록펠러재단의 기대를 충족시킬 종합대학이 없었다. 수업의 질을 높이기 위해, 13개 대학에 8년간 자금과 시설을 지원했다. 예과생들은 미국인 선교사 스튜어드가 설립한 옌칭(燕京)대학을 선호했다.
 
협화의학원은 인문교육을 중요시했다. 훌륭한 의사가 되려면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예과생들은 3년간 옌칭대학에서 의학과 상관없는 교육을 받았다.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의 동생 량치슝(梁啓雄·양계웅)에게 돌대가리 소리 들으며 제자백가를 익히고, 하버드대학에서 송사(宋史) 강의로 명성을 떨친 네충치(聶崇岐·섭숭기)의 현란한 중국 통사 강의에 입이 벌어졌다. 심리학과 사회학은 격주로 치르는 시험에 애를 먹었다. 자연과학과 영어는 기본이었다.
 
협화의원 내과 주임을 역임한 전 중국 혈액학회 회장의 회고를 소개한다. "예과를 마친 후 본과 입학시험 통과하면 교수가 집으로 초청했다. 같이 저녁 먹으며 가정형편과 취미, 사회문제에 대한 견해 등을 영어로 물었다. 학생의 언동과 영어회화 능력을 유심히 살피는 눈치였다. 엔칭대학에서 교육받은 의예과 동기 53명 중 13명이 협화의학원 본과에 합격했다.”
 

농촌 의료봉사 나온 협화의학원 여학생. [사진 김명호]

본과 5년은 하루하루가 질식할 정도였다. 저명한 비뇨기과 전문의가 구술을 남겼다. "오전 8시에 기숙사에서 학교로 이동했다. 오후는 실험 수업이었다. 학생들은 밤 12시가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시험이 임박하면 교내에 긴장이 감돌았다.” 학생 중에 결핵 환자가 속출했다. 학교가 요구하는 평균 75점에 들지 못하면 재시험을 치렀다. 두 번째도 미달이면 유급시켰다. 세 번째는 학교를 떠나야 했다. 가혹한 규정은 록펠러 2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협화를 중국에서 가장 현대화된 의학원과 의원으로 만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30년대 협화의원은 록펠러재단이 미국과 독일에서 초빙한 의사와, 협화의학원이 배출한 명의들이 포진한, 동양 최고의 종합병원이었다.
 
록펠러재단은 시야가 넓었다. 저우커우덴(周口店)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70㎞ 떨어진, 교통이 불편하고 인구도 희박한, 기름 한 방을 안 나는 중국의 촌구석에 미국의 석유 황제가 거금을 투자했다. 저우커우덴은 북송(北宋)시대부터 소문난 용골(龍骨) 산지였다. 오랜 세월, 용골은 하늘이 내린 명약으로 통했다. 1900년 8국 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하자 베이징은 혼란에 빠졌다. 탈출,을 준비하던 독일 의사가 용골이 든 약 상자를 동포 동물학 교수에게 귀중한 약재라며 선물했다. 약재를 세밀히 연구한 동물학 교수는 고영장류(古靈長類)의 치아 한 개를 발견했다. 이 발견은 국제 학술계를 진동시켰다.
 
발굴작업 2년 만에 두개골 화석 찾아
 

베이징원인을 관찰하는 협화의학원 외국인 교수. [사진 김명호]

1914년, 베이징정부 농상부(農商部)가 스웨덴 지질학자 앤더슨을 고문으로 초빙했다. 앤더슨은 중국의 용골에서 적출했다는 치아 조각이 머리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기사들을 모집해 화베이(華北) 지역의 용골 화석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용을 숭상하는 민족이다 보니 마을 사람들이 용골산이라 부르는 산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앤더슨은 저우커우덴의 용골산을 주목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 동료에게 "인류 조상의 유해가 그곳 어딘가에 있다는 예감이 든다”는 말을 자주했다. 1926년 베이징협화의원 강당에서 세계를 향해 선포했다. "저우커우덴에서 인간의 치아 화석을 발견했다.” 중국은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동3성 독립선언과 국민혁명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북벌선서, 상하이의 누드모델 파동에 묻혀버렸지만, 미국의 록펠러재단은 달랐다. 앤더슨의 발표 당일 성명을 냈다. "저우커우덴의 발굴을 지원하겠다. 중국의 지질연구소와 함께하기를 희망한다.”
 
1927년 봄, 저우커우덴에서 대규모 발굴의 막이 올랐다. 황폐한 용골산에 사람이 나무보다 많았다. 발굴은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주민들도 조용한 마을이 이상한 사람들 북적거린다며 불평이 심했다. 2년간 진전이 없자 발굴단도 맥이 빠졌다. 포기를 저울질할 무렵 기적이 일어났다. 1929년 12월 2일, 기후관계로 철수를 준하던 중, 베이징대학 지질학과를 갓 졸업한 페이원중(裴文中·배문중)이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벌떡 일어났다. 앞에 보이는 작은 구멍을 헤치자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드러났다. 빨려 들어가다시피 한 페이는 거미줄 같은 광선 밑에 있는 편원형(扁圓形)의 물체를 관찰했다. 두개골이라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베이징원인이 발견되기까지는 록펠러재단의 막대한 지원이 주효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