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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헤이하치로 불사설, 그 씨앗은 집권층의 부패

bindol 2021. 8. 27. 05:36

홍경래·헤이하치로 불사설, 그 씨앗은 집권층의 부패

중앙일보

입력 2021.05.07 00:38

업데이트 2021.05.0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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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반 한·일 양국의 민란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조선 집권층의 지역 차별에서 시작됐다. 당시 난 집압에 투입된 군병들의 상황을 기록한 ‘홍경래진도(洪景來陣圖)’. 조선 후기 군대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조선 후기의 평안도는 매우 역동적인 지역이었다. 국내 상업과 대외무역이 활발해지고 광업과 수공업도 발달하여 경제력이 크게 신장했다. 경제력이 커지면서 곳곳에 서당이 보급되고 문무(文武)의 재능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인물들이 대거 나타났다. 자연히 정치적 입신을 꿈꾸며 과거에 응시한 사람도 크게 늘었고, 18세기 이후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암울했다. 일찍부터 서북인(西北人·평안도와 함경도 사람) 차별이 만연하면서 평안도 출신은 과거에 합격해도 6품 이상의 관직으로 올라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정치·사회적 상승 열망이 기존 체제의 장벽에 부딪히자 지식인들의 불만과 저항의식은 날로 높아졌다. 19세기 중엽, “서북은 모두 반란을 생각하고 있다(西北擧皆思亂)”는 이야기가 등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배경과 관군의 진압 활동 등을 읊은 ‘정주승전가(定州勝戰歌)’. [중앙포토]

평안도 용강 출신의 홍경래(洪景來·1771~1812)도 저항을 꾀했던 지식인이었다. 일찍부터 전국을 유랑하며 정세와 민심을 살피며 거사를 준비했다. 유례없는 대기근으로 민심이 흉흉했던 음력 1811년(순조 11) 12월 18일, 홍경래의 반군은 가산(嘉山) 다복동에서 봉기했다.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를 칭했던 홍경래 휘하에는 지식인, 장사(壯士), 대상인, 지역 아전과 토호, 그리고 다수의 농민이 참여했다. 반군 지휘부는 거사 당시 내세운 격문에서 김조순(金祖淳) 등 세도 정권의 간신배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권력을 농단하고 권세가의 노비들조차 평안도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는 현실을 통탄했다.

“홍경래는 죽지 않고 대마도로 잠입” 선전

1783년(천명 3)에 발생한 일본 대기근의 참상을 묘사한 ‘천명기근지도’. [사진 일본 소학관 발행 『에도시대관 』]

봉기 이후 수천 명으로 늘어난 반군은 안주와 의주 두 방향으로 진격하여 청천강 이북 8개 군을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지만 거기까지였다. 관군의 맹렬한 반격에 밀려 안주와 의주 공략에 실패했던 반군은 12월 29일 이후 정주성으로 내몰렸다. 관군은 1812년 1월 3일 정주성을 포위했다. 반군은 포위망을 뚫으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공방이 이어지자 관군은 땅굴을 파고 화약을 설치하여 성을 함락시키려는 작전을 세운다. 급기야 4월 19일, 화약 폭발과 함께 정주성으로 돌입했던 관군은 반군 2983명을 체포했고, 부녀자와 아이를 제외한 성인 남자 1917명을 처형했다.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홍경래의 거사가 처절하게 종식되는 순간이었다.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홍경래는 죽었지만 이후에도 그의 영향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813년 제주도의 풍헌(風憲) 양제해(梁濟海)는 홍경래의 거사 소식에 자극을 받아 변란을 꾀하다가 체포됐다. 1817년 “전주를 점령한 뒤 서울로 진격한다”며 변란을 꾀했던 떠돌이 약장수 출신의 채수영(蔡壽永) 등은 “홍경래는 죽지 않고 대마도로 잠입했다”고 선전했다. 1826년 청주성 성벽에 집권 세력을 비난하고 민란을 선동하는 괘서(掛書·익명으로 쓴 대자보)를 부착했던 김치규(金致奎)도 ‘홍경래 불사설’을 퍼뜨렸다. 평안도 출신의 유랑 지식인 김치규는 괘서의 내용을 홍경래의 격문에서 베낀 구절로 채우기도 했다.

1783년(천명 3)에 발생한 일본 대기근의 참상을 묘사한 ‘천명아사도’. [사진 일본 소학관 발행 『에도시대관』]

‘홍경래 불사설’은 어떤 배경에서 나타났을까.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전반, 가장 오랫동안 준비하고 최대 규모의 인원을 조직적으로 동원했던 민중운동이었다. 거기에 왕조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려고 했던 대담함과 자신감은 거사 실패 이후에도 새로이 저항을 꾀하고 변혁을 열망하던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피지배자’이자 ‘통치의 대상’에 불과했던 하층민들은 홍경래의 난을 계기로 봉건 권력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1833년(천보·天保 4) 무렵부터 수년간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다. 이상 저온과 대홍수, 풍재 등이 겹치면서 동북 지방의 곡물 수확량은 평년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쌀값이 폭등했고 수만 명이 굶어 죽는 참상이 빚어졌다. 1836년 카이(甲斐·오늘날 야마나시현)에서는 벼랑 끝에 몰린 빈농들 1만여 명이 들고 일어나 250채 이상의 가옥을 때려 부수는 사태가 발생했다. 미카와(三河·오늘날 아이치현)에서도 빈농 1만2000여 명이 봉기하는 대규모 저항운동이 벌어졌다.

오시오 헤이하치로

대기근의 여파는 막부의 직할 도시이자 일본 최대의 미곡 집산지였던 오사카에도 본격적으로 밀려왔다. 미가가 폭등했고 시중에는 아사자와 걸식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빈민들은 무리를 지어 쌀가게를 습격했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1837년 오사카의 요리키(與力·지방 하급 관리) 출신 지식인 오시오 헤이하치로(大鹽平八郞·1793~1837)가 하층민들을 규합하여 궐기했다. 헤이하치로는 하층민들이 고통받고 있음에도 지역의 행정 책임을 진 관리가 상황을 방치하거나 호상(豪商)들이 매점매석을 통해 폭리를 취하고 있는 현실에 격분했다. 당시 오사카 후교(奉敎·막부가 임명한 지방 행정 책임자) 아토베 료스케(跡部良弼)는 궁민들을 구제하기는커녕 호상들과 결탁하여 미곡을 에도(江戶·오늘날 도쿄)로 빼돌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헤이하치로는 아토베에게 오사카 호상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빈민들을 구제하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아토베는 청원을 수용하는 대신 “은퇴한 자가 정치적 의사를 표시했다”며 헤이하치로에게 강소죄(强訴罪)를 들이댔다. 헤이하치로는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헤이하치로는 자신의 장서 1200여 권(5만 권이라는 설도 있음)을 처분하여 확보한 자금을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민생을 돌보지 않는 권력에 맞서 궐기하라고 촉구하는 격문을 발표했다. 1837년 2월 19일, 아토베와 호상들을 응징하기 위해 헤이하치로와 그의 제자들, 도시 빈민과 빈농 300여 명은 ‘백성을 구한다(救民)’고 쓴 깃발을 들고 봉기했다. 미리 준비한 대포를 쏘면서 호상들의 점포가 밀집한 선착장과 시가를 공격했다. 아토베 등이 동원한 진압군에 밀려 폭동은 몇 시간 만에 진압됐지만, 오사카 시내의 20% 정도가 불타는 상황이 전개됐다. 헤이하치로는 체포를 피해 은신했다가 40일 만에 분신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일찍이 열네 살에 후교쇼(奉行所)에 들어가 24년간이나 공직에 몸담았던 헤이하치로가 반란의 선봉에 섰던 까닭은 무엇일까. 주목되는 것은 그가 일찍부터 양명학(陽明學)을 깊이 공부하고 요리키로 근무하는 중에도 세심동(洗心洞)이라는 교습소를 열어 동료와 농민들의 자제들을 가르쳤던 사실이다. 양심적인 공직자이자 실천적인 지식인이었던 헤이하치로는 하층민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권력자들의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분연히 궐기함으로써 양명학에서 강조했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직접 실천하고자 했다.

평생 지행합일 실천한 양심적 공무원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편지. [사진 일본 중공문고 『일본의 역사』]

그래서였을까. 반란 과정에서 자신의 집이 불타버린 오사카의 민중들은 헤이하치로를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은커녕 그를 신처럼 떠받드는 분위기와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일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일각에서는 그가 규슈로 갔다거나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망명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주변 농촌의 주민들 가운데는 헤이하치로가 발표했던 격문의 내용을 몰래 베껴 간직하거나 전파하는 사람도 있었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 하층민들을 구원하자는 헤이하치로의 외침을 직접 계승하려는 움직임도 이어졌다. 1837년 4월 빈고(備後·오늘날 히로시마현)에서 봉기했던 사람들은 ‘헤이하치로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6월 에치고(越後·오늘날 니이가타현)에서는 이쿠타요로스(生田万)라는 지식인이 헤이하치로의 제자임을 내세우면서 ‘천명을 받들어 국적을 토벌한다(奉天命誅國賊)’ ‘충신을 모아 궁민을 구원한다(集忠臣救窮民)’는 깃발을 앞세우고 부호들을 습격했다. 헤이하치로는 비록 죽었지만 불의한 권력에 맞서려 했던 민중과 지식인들의 영웅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 노력을 통해 정치적 상승을 추구했던 지식인들의 열망이 기존 체제의 장벽에 막혀 좌절될 때, 권력의 구조적인 억압과 사회경제적 고통에 신음하는 다중(多衆)의 호소를 무능하고 무책임한 집권자들이 외면할 때 사람들은 영웅의 재림(再臨)을 염원하게 된다. 19세기 초반 2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조선과 일본에서 나타났던 ‘홍경래 불사설’과 ‘오시오 헤이하치로 불사설’은 그 같은 염원을 대표하는 역사적 실례인 셈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