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산 가을 상품
중앙일보

문태준 시인
가을이 깊어갈수록 열매는 달콤하다. 그러나 나뭇가지의 끝에 매달린 어떤 열매들은 나만의 몫이 아니다. 한동안 아침에 꾸지뽕나무 아래에 가서 꾸지뽕 열매를 주웠는데, 이제 꾸지뽕 열매는 내 것만은 아니다. 며칠 전보다 훨씬 더 붉고 훨씬 더 단맛이 든 꾸지뽕 열매는 여러 마리의, 여러 종류의 새들의 소유가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새들의 것도 되었다. 나는 새들이 쪼아 먹다 반쯤 남은 꾸지뽕 열매를 줍는다. 이제 나는 새들이 먹다 남긴, 여분의 열매를 얻어먹는다. 기어 다니는 벌레가 이 꾸지뽕 열매를 먹다가 남겨 놓으면 그때에 나는 꾸지뽕 열매의 한 조각을 얻어먹는다. 꾸지뽕 열매 반쪽도 나눠 먹는다.
제주에 와 살면서 조밤나무 열매를 알게 되었다. 육지에서는 구실잣밤나무라고 불리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 밤 열매가 작아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고 한다. 열매는 날로 먹거나 구워서 먹는다며 지인은 조밤을 주워 이빨로 깨물어 까는 것을 보여주었다. 요즘은 잘 주워먹지 않는 조밤에 나는 또 관심이 생겨 당분간은 조밤나무 아래를 서성거리게 될 것 같다.
열매 하나를 둘로 쪼개 먹는 가을
감각은 예민하고 사색은 깊어져
잠깐씩 한가한 마음도 얻었으면
날이 쌀쌀해지니 그동안 밀쳐두었던 시집을 꺼내 읽게 된다. 작고한 최하림 시인의 시집을 내내 가까이에 두고 읽으며 가을날을 지낸다. 최하림 시인의 ‘가을날에는’이라는 시에 이런 시구가 있다.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음걸이에도/ 메뚜기들은 떼 지어 날아오르고 벌레들이 울고/ 마른풀들이 놀래어 소리한다 소리들은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저만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 멀리/ 사과밭에서는 사과 떨어지는 소리 후두둑후두둑 들리고/ 붉은 황혼이 성큼성큼 내려오는 소리도 들린다.’
이 가을의 시간에는 소리가 잘 들린다. 사방이 고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의해 생겨나는 소리에 모두 예민해지는 때이다. 시인은 이것을 잘 알아 자신이 다른 것들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무단으로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조심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써도 그 걸음 소리에 메뚜기들이 놀라 날아오르고, 벌레가 울고, 마른풀들이 흔들린다. 존재들은 서로 주고받는 영향 관계에 있으므로,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으므로 소리들은 연쇄적으로 반응한다. 서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저쪽 사과밭에서는 사과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저녁때의 석양도 성큼성큼, 발을 크게 떼어 놓으며 지상으로 내려온다. 열매가 떨어지는 소리와 하루가 저무는 그 발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들린다.
이 시에서처럼 가을에 우리의 감각은 예민해진다. 단풍이 들고, 잎사귀가 떨어지는 자연의 일이 흔히 있을 만한 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무심하게 여겼던 시간의 흐름에 내 마음을 얹어 상념에 젖기도 한다. 그러나 이 상념은 이익이 없지 않다.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을 품게 되어 때로는 외롭고 쓸쓸하다고 느낄 때가 없지 않지만, 그동안 질주하듯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도 한 번 질문해보게 되는 것이다.
아침에 마당에 나갔더니 어디선가 은은한 향기가 풍겨온다. 올해 심었던 은목서에 작고 흰 꽃이 피어 그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주에서는 금목서와 은목서를 집에 더러 심는데, 그 꽃이 이즈음에 핀 것이었다. 나무의 꽃향기를 맡는 일도 도시에서는 밀쳐놓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시골에 와서는 흔한 일이 되었고, 일부러 찾아서 하는 일이 되었다. 몇 달 전 밤에는 한라봉 꽃향기를 맡은 적이 있었는데, 캄캄한 어둠 속에서 꽃의 향이 흰빛처럼 흘러나오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요즘 가을볕은 금모래처럼 곱다. 잠깐씩 햇살 속에 앉아 있기도 한다. 무언가를 노란 보자기에 싸서 놓아둔 것처럼 마루에 내려앉는 가을빛은 따사롭기만 하고, 푸근한 마음을 일으킨다. 이 햇살을 잘 저장할 수 있다면 두고두고 아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지난 일요일에는 햇살 속에 있으면서 저쪽에 잘 익은 감이 바람에 흔들흔들하는 것을 보았다. 감나무는 빈집의 허물어진 돌담에 기대어 서 있었다. 감나무의 가지들이 흔들흔들하는 모습이 한가하니 참 좋았다. 일상을 헐렁하게 입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노랗게 익은 귤 하나의 맛에서, 노랗게 익은 모과 하나의 향에서 우리는 가을을 느낄 수 있다. 가을의 시간에 짧게 만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자연산 상품들을 우리의 마음으로 구매해도 좋을 것 같다. 화폐를 지불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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