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무예書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무예서(書)인 '무예제보(武藝諸譜)'가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이 된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1598년(선조 31년) 왕명을 받아 편찬한 '무예제보'는 명나라 군대의 전술을 참고해 여러 무기의 제조법과 조련술을 한문과 한글, 그림으로 설명한 책이에요. 이 책은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에 나왔는데, 전쟁과 어떤 관련이 있었을까요?
변화에 적응 못 한 조선의 군사전략
전통적으로 한·중·일 삼국의 무예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중국은 무예의 고수(高手)가 돼서 기술적인 성취와 화려함을 보여주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에 군사전략에서도 그 화려함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일본은 '팔 하나를 내주더라도 상대의 목을 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자기가 다치더라도 싸움에서 이기는 걸 높이 쳤어요. 한국은 대체로 기술이나 승리보다는 무예를 하나의 예(藝)로 여겨 자기 완성의 경지에 이르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무예관(觀)으로 볼 때 실제 전쟁에선 일본군의 전투력이 가장 강할 수밖에 없었어요. 게다가 조선은 16세기에 이르러 전술 변화에 기민하게 적응하지 못했어요. 원래 조선군은 말을 타는 북방 이민족에 대응하기 위해 기병(말을 타고 싸우는 병사) 중심으로 강한 진형(진을 친 형태)을 이루는 오위진법(五衛陣法) 전술을 썼습니다. 원거리에서 활을 쏴 적을 제압하는 방식이었죠. 조선 시대 무과시험의 핵심 과목이 활쏘기와 마상(馬上) 무예였던 것은 이런 전술의 영향이었습니다.
"근접전에 필요한 무예를 익혀라"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초반 육상전에서 조선군은 계속 졌어요. 전통적인 진법이 일본의 새로운 전술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보병 위주 일본군은 휴대용 화약 무기인 조총으로 기선을 제압한 뒤 빠르게 창검을 휘두르며 근접전을 펼쳤죠. 조선이 200년의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던 반면, 일본은 영주들이 서로 싸운 전국시대(1467~1573)를 거치며 전투력이 크게 상승한 상황이었습니다. '조선군이 칼집에서 칼을 뺄 틈도 없이 적군에게 당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까요.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선조는 근접전에서 이길 수 있는 무예를 익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명나라가 왜구의 근접전에 맞서기 위해 개발한 '절강병법'을 익히기 위해 그것이 실려 있는 '기효신서'란 책을 찾으라 명했습니다.
신하들은 전쟁통에 어렵게 책을 구했고, 훈련도감 낭청 벼슬의 한교는 이 책에서 근접전에 효과적인 6가지 무예를 뽑아낸 '무예제보'를 썼죠. 1610년(광해군 2년)에는 청나라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4가지 무예를 더한 '무예제보번역속집'이 나왔습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던 1759년(영조 35년)에는 근거리 접전용 군사 무예 18가지를 모은 '무예신보'가 출간됐죠. 이 책은 지금 전해지지 않아요. 무예에 관심이 많던 사도세자가 조선 초에 비해 희미해진 상무(尙武·무예를 중히 여겨 높이 받듦) 정신을 회복하려 했던 의지의 표명이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 같은 상무 정신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에게로 계승됩니다.
실전 무예를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
마침내 1790년(정조 14년), 한·중·일의 무예를 집대성한 종합 무예서이자 실전 훈련교범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출간됩니다. 정조 임금의 명을 받은 실학자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당대의 창검술 1인자로 꼽혔던 무관 백동수가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무예도보통지엔 장창(긴 창), 당파(창날이 세 갈래인 창), 낭선(대나무 가지 끝에 날을 단 창), 쌍수도(두 손으로 쥐고 쓰는 칼), 예도(끝이 날카로운 칼), 왜검(일본 칼), 본국검(우리 고유의 칼), 권법, 곤방(막대기), 마상편곤(말 위에서 쓰는 도리깨 같은 무기) 등 24가지 무예가 수록됐어요. 이어 24종 무예를 자법(刺法·찌르기), 감법(坎法·베기), 격법(擊法·치기) 같은 새로운 체계로 정리했습니다. 중국과 일본 무술이 많이 활용됐는데, 예를 들어 '장창' 부분은 중국의 '양가창법'을 많이 참고했다고 합니다. 홍콩 소설가 진융(金庸)의 '사조영웅전'에도 등장하는 무술이죠.
'전통 무예의 동의보감'이라 불리는 이 책엔 정조 임금의 실용 정신이 담겨있어요. 구체적 동작을 그림과 함께 설명해 곧바로 실전 훈련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한 무예 전문가는 "무예의 연속 동작을 비디오처럼 하나하나 그림으로 펼쳐 보여주는 무예서는 당시 동양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 후기 중앙 5군영(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총융청·수어청)과 지방의 속오군 체제가 확립된 것과도 관련이 있어요. 평소에 생업에 종사하고 일이 있을 때 향토를 방위하는 속오군도 중앙군과 같은 수준의 무예를 익힐 수 있도록 잘 정리된 무예서를 만든 것이지요.
'무예도보통지'가 발행된 정조 때는 개항 이전 조선 왕조 사상 가장 관군의 전투력이 강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 전쟁이 일어나진 않았어요. 조선이 다시 외국과 전쟁을 한 것은 무예도보통지가 간행된 지 76년이 지난 1866년 병인양요였는데, 세상이 또 바뀌어 프랑스군의 신식 화포와 총기 앞에선 무예가 별 역할을 못 했죠. 이후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는 많이 잊혔고 소수 인원에 의해 맥을 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택견'은 민간에서 전래된 무예예요.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상대를 발로 차거나 넘어뜨리는 동작을 갖고 있지요. 마을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또는 여가 활동으로 택견을 배웠대요. 단오·대보름 등 민속 행사날에도 행해지고, 마을끼리 시합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비교적 잘 전승되고 있습니다.
☞北의 세계기록유산 된 '무예도보통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2017년 독창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어요. 하지만 유네스코 등재를 신청한 곳은 한국이 아니라 북한이었어요. 북한의 유일한 세계기록유산이 됐죠. 한국에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이 이 책을 보유하고 있지만 등재 신청을 하지 않았고, 그 사이 북한이 신청해 버린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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