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특사파견의 명암 2002년 봄 환대 받은 임동원 특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질문에 김용순 노동당 통일전선 담당 비서는 당혹해 하며 “저는 20회까지…”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좌중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난 2002년 4월4일 밤 평양 백화원초대소. 2시간에 걸쳐 임동원 대북특사와 회담을 한 김정일은 이어진 만찬에서 특유의 과장된 제스처와 유머 섞인 말투로 환담을 이어갔다. 김 위원장은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통일 특보에게 “특사 선생도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 보셨겠지요. 우리 북남 사이의 현실을 잘 그렸더구만요. ‘쉬리’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라며 감상평을 했다. 남한 사회를 훤히 들여다보는 듯 “혜은이의 노래 ‘감수광’을 좋아합니다. 나훈아의 ‘갈무리’도 좋지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김정일의 언급에 임 특보는 내심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12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끌어모은 히트작인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지 못한 데다 TV드라마도 미처 챙겨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북특사 파견이나 북한 최고지도자 면담이 늘 수월했던 건 아니다. 남북 장관급회담을 위해 2000년 8월 평양에 간 박재규 통일부 장관은 김정일 면담을 위해 밤새 열차를 타고 함경도의 한 초대소로 달려가야 했다. 당시 서울에선 “김정일 면담을 고집 말라”고 훈령을 내렸지만 박 장관은 국방장관 회담 성사 등을 관철시키려면 김정일과 직접 만나야 한다는 판단에서 밀어붙였다는 후문이다. 2005년 6.15 통일대축전 단장으로 방북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현지에서 특사로 임무를 전환해 김정일과 가까스로 만났다. 북한은 정 장관 일행의 입북 때 ‘공군 훈련으로 비행장이 복잡하다’거나 ‘평양 상공에 번개가 친다’며 2시간 넘게 항공일정을 지연시키는 몽니를 부렸다. 임동원 특보도 2003년 1월 특사방문 때는 북핵 논의 등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측에서 이종석 인수위원(전 통일부 장관)이 함께 갔지만 북한은 김정일 면담 등 남측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최고지도자 면담 여부는 대북특사의 성패를 좌우한다. 지난달 말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이 전격 취소된 것도 이런 측면 때문이다. 비핵화 합의 이행보다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고집하는 북한의 태도로 볼 때 특사파견이 의미가 없다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판단한 것이다. 김정은 면담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도 고려됐을 공산이 크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3월 5일 정의용 특사 일행이 평양에 도착하자 오후 6시 회담을 했다. 만찬장에는 부인 이설주와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동반해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막판까지 면담 여부를 놓고 특사단을 애태우게 만들던 김정일 시대의 구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이런 ‘환대’가 이번에도 이어질지는 장담하기 쉽지 않다. 3월 평양은 남북관계 복원에 이은 북·미 정상회담이란 큰 판을 짜고 있을 시점이었다. 2월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유화국면으로 돌아선 북한에게 남측 특사의 방북은 서울과 워싱턴으로 갈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특사 방북 자체만으로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의 기대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던 북한의 태도가 석연치 않다는 여론이 거세다. 6개월 전 김정은의 말 한마디에 요동치던 상황에서 이젠 합의이행의 발걸음 쪽으로 관전 포인트가 옮겨졌다는 얘기다. 김정은의 감정이 다소 격앙된 상태인 것도 문제로 꼽힌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에 나서고 ‘완전한 비핵화’를 언급하면 숨통이 트일 거라 생각했지만 대북제재의 고삐는 여전하다.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다고 절감한 듯, 김 위원장은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현장에서 “강도적인 제재 봉쇄”(8월17일 조선중앙통신)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청와대와 정부의 고민은 깊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제 대북특사를 거론하며 “지금은 한반도 평화정착에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임종석 비서실장은 페이스북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특사단을 응원해달라”는 글을 올렸다. ‘9월 평양 개최’로 합의한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간 정상회담 일정을 잡는 것 외에도 비핵화 등 현안 논의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특사단의 마음도 무거울 수밖에 없다. 특사는 한 나라의 국격(國格)을 반영한다. 꼬여버린 북핵 문제와 한반도 이슈를 풀어내는 것 못지않게 당당하고 품위를 잃지 않는 대북접근 방식이 대북특사단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3월 김정은 면담 석상에서 정의용 특사와 4명의 우리 대표 전원이 고개 숙여 메모에 여념이 없는 모습은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남북관계에서 때론 중후장대한 정책이나 이슈보다 이런 장면 하나가 여론을 롤러코스터에 태울 수 있다. 꼬리가 몸통을 뒤흔드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얘기다. 과거 특사단의 왼쪽 가슴에 자랑스럽게 달려있던 태극기 배지가 언제부턴가 슬쩍 사라져버린 것도 유감이다. 김영철 당 통일전선부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 등 북측 배석자가 김일성·김정일 배지(북측은 ‘초상휘장’으로 호칭)를 여전히 달고 나오는 것과 대비된다. 국가대표가 국민의 눈을 피해 태극마크를 슬그머니 떼어버리고 경기에 나간 형국이다. “북측에 한 명의 ‘최고 존엄’이 있다면, 우리에겐 5000만 국민 모두가 최고 존엄인 세상이 있다”고 외칠 수 있는 당당함을 문재인 정부 대북 특사단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인지 묻고 싶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출처: 중앙일보] 대북 특사단 가슴서 슬쩍 사라진 태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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