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신명재판(神明裁判)
1077년 12월, 노르망디의 대귀족 로제 2세의 성에 괴한들이 침입해 부인 마빌 드 벨렘(Mabile de Bellême)을 무참히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공모 혐의를 받던 기사 기욤 팡톨(Guillaume Pantol)은 로제의 부하들에게서 살해 위협을 받자 수도원으로 도주해 갔다. 팡톨이 계속 무죄를 탄원하자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윌리엄은 신명재판(神明裁判)을 열기로 결정했다.
“팡톨이 빨갛게 달궈진 쇠를 맨손으로 잡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전혀 화상을 입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성직자와 군중들이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양했다.”
달군 쇠를 붙잡았는데 전혀 상처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의심스럽지만, 왜 그것이 피고가 무죄라는 증거가 되는지 현재 우리로서는 수긍하기 어렵다. 중세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무고한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이 지켜주신다고 믿었기에 이런 재판이 가능했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는 제도를 신명재판이라 한다. 영어로는 ‘ordeal’이라 하는데 독일어의 ‘Urteil(판결)’과 어원이 같다. 신명재판이 많이 이루어진 곳은 라인강과 루아르강 사이 지역, 다시 말해서 카롤링거 왕조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니, 이교 시대 게르만족의 제도가 기독교의 외피를 두르고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고통스러운 행위 통해 하느님 뜻 확인
신명재판에는 여러 방식이 있으며, 나름대로 정해진 절차가 있다. 원래 달군 쇠를 잡는 방식은 그 상태로 몇 걸음을 걷든지 찬송가를 한 곡 부르게 한 후 붕대로 손을 싸맸다가 사흘 후 풀어서 상처 정도를 살펴보는 것이다. 상처가 심하면 유죄, 그렇지 않으면 무죄다. 펄펄 끓는 물이 가득 찬 솥에 손을 집어넣어 동전을 집어내도록 하는 재판도 비슷하게 진행한다. 피고의 손발을 묶은 다음 강이나 못에 던져 넣는 방식도 있다. 이때 피고가 물속에 가라앉으면 무죄, 둥둥 뜨면 유죄다. 축성을 한 물은 순수한 성질 때문에 더러운 죄인이 들어오면 뱉어버리고, 깨끗한 사람이 들어오면 품으려 하기 때문이다. 빵과 치즈를 이용한 신명재판에서는 피고에게 축성한 커다란 빵과 치즈 덩어리를 먹게 한다. 죄 지은 인간이라면 빵 덩어리를 삼키지 못하고 목이 막혀 말을 하지 못한다. 원고와 피고가 십자가를 향해 손을 옆으로 들고 있다가 먼저 손을 내리는 쪽이 유죄가 되는 십자가 신명재판도 있다.
결투도 원리로 보면 신명재판의 한 종류다.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끼리 싸우도록 해서 이기는 편을 무죄로 선언한다. 설령 약한 사람이라도 진정 무고하다면 하느님이 도와주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하게 마련이라는 논리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린아이나 여성이 싸움에 나설 수는 없는 법. 이때에는 대신 싸워줄 기사를 내세울 수 있다. 이렇게 약자를 위해 결투에 나선 사람이 원래 의미의 챔피언(champion)이다. 950년, 황제 오토 1세의 딸이 코농(Conon)이라는 자에게서 중상모략을 당했을 때 부샤르(Bouchard) 백작이 챔피언으로 나섰다. 그가 성인의 유골에 손을 얹고 코농이 거짓말한다고 맹세하자, 상대방 역시 유골에 손을 얹고 부샤르 백작이야말로 거짓말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결투를 하려 하자 코농의 손에서 힘이 빠져 무기를 들 수 없게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갈수록 물에 던져 넣는 신명재판 늘어나
중세사 연구자들에 의하면 시간이 갈수록 물에 던져 넣는 방식이 늘어났다. 이 방식의 장점은 현장에서 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험에 든 피고 중 60% 정도는 물속에 가라앉아 목숨을 구했지만, 나머지 40%의 불행한 사람들은 참화를 면하지 못했다. 1114년, 수아송 지역에 이단이 만연했을 때 클레망(Clément)이라는 농민 형제가 조사를 받았다. 미사를 드리고 악마가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구마 의식(exorcism)을 한 후 클레망에게 물속에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클레망이 나무토막처럼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본 군중들은 그 자리에서 클레망 일당을 태워 죽였다! 1170년 잉글랜드에서 에일워드(Ailward) 또한 절도죄에 몰려 신명재판을 받았는데 그만 물 위에 동동 뜨고 말았다. 그는 현장에서 눈이 뽑히고 고환이 잘리는 처벌을 받았다. 대략 이 시기에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재위 1154~1189)는 신명재판에서 유죄로 확정된 자는 발 하나와 오른손을 자르도록 규정한 사법 개혁을 수행했다. 다행히 에일워드는 후일 간절한 기도를 통해 잃었던 신체 부위들을 되찾았다(다만 눈이 다소 침침하고 고환은 오리지널보다 사이즈가 작아졌다고 기록에 전한다).
현재 우리가 보기에는 이 제도가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당시에는 그 나름의 기능이 있었다. 분쟁 중인 당사자들이 한도 끝도 없이 계속 싸우려 하면 신명재판을 통해 최종적으로 소송을 끝낼 수 있다. ‘계속 고집 피우다가는 펄펄 끓는 물에 손을 넣어야 할 거야…’ 재판관이 이런 식으로 은근히 협박해서 자백을 받든지 화해를 유도할 수도 있다. 한쪽에서 기꺼이 달군 쇠를 잡겠다고 하면 다른 편이 수긍하는 수도 있다. 저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정말 자신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신명재판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져
그렇지만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신명재판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유무죄의 기준이 너무 모호하다. 손바닥 상처가 어느 정도면 유죄이고 어느 정도면 무죄인가? 물속에 완전히 가라앉지도 않고 완전히 뜨지도 않은 상태에서 첨벙대고 있으면 유죄인가 무죄인가? 많은 경우 명확한 기준보다는 모여든 군중들의 함성에 따라 판결이 나곤 한다. 사람들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무죄라고 선언하기도 하고, 반대로 유죄라고 목소리를 높인 후 곧바로 달려들어 처형하기도 한다. 한편은 무죄라고 소리 지르고 다른 편은 유죄라고 소리 지르는 경우도 기록에 나온다. 기준의 모호함에다가 노골적인 부정행위도 더해진다. 달군 쇠를 잡기 전에 손바닥에 미리 고약을 바르거나, 물속에서 숨을 참으며 오래 견디는 기술을 연마한 사례도 있다. 재판을 집행하는 사람이 피고를 무죄로 만들고 싶으면 쇠를 적당한 온도로만 달구기도 한다. 기적이 아니라 사기가 재판을 결정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점차 신명재판에 대한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신학자들은 하느님에게 기적을 강요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요구한다고 하느님이 꼭 기적을 보여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만일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다면 악마의 농간이 아니라고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이런 이유로 12세기 파리의 신학자 피에르 라 샹트르(Pierre le Chantre)는 신명재판이 ‘악마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법학자들 역시 이런 재판이 합리성을 결한다고 비판했다. 무고한 사람을 살인자로 몰아갈 수도 있고, 유죄인 사람이 풀려날 수도 있다. 이런 배경에서 1215년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사제들의 신명재판 참여를 금지했다. 그럼에도 신명재판은 근대적 사법 체제가 자리 잡기까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세계의 신명재판 사례]
신명재판은 세계 여러 문명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도차이나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고대국가 푸난(扶南)에 관한 중국 기록을 보자. “나라에는 감옥이 없다. 만약 송사가 생기면 달걀만 한 금가락지를 끓는 물에 넣고는 그것을 꺼내게 하든가 쇳덩어리를 붉게 달구어 손 위에 올려놓고 일곱 보를 가게 한다. 그러면 죄 있는 자는 손이 타고 죄 없는 자는 상하지 아니 한다. 또 물속에 들어가게 해 보면 옳은 자는 가라앉지 아니하고 그른 자는 즉시 가라앉는다.”(최병욱, ‘동남아시아사’ 중에서) 중세 유럽에서 행하던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지만, 유럽과 달리 물속에 가라앉으면 유죄, 뜨면 무죄라는 점이 흥미롭다. 아프리카 토고에서는 피고가 끓는 기름 속에서 물건을 꺼내도록 하는데, 이를 거부하면 유죄가 된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19세기까지도 독성이 있는 탄제나(tangena) 열매를 먹고 이를 견뎌내면 무죄로 판단하는 재판을 했는데, 이로 인해 매년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이런 사례들은 탁월한 법조인들, 완벽한 사법 체제를 자랑하는 현재 우리나라와는 거리가 먼 야만적인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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