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7] 스포츠맨십 대신 권력·영예 얻는 길로 악용

bindol 2021. 11. 25. 18:26

고대 올림픽은 초고속 출세코스… 우승자는 軍지휘관으로 발탁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7] 스포츠맨십 대신 권력·영예 얻는 길로 악용

입력 2021.08.10 03:00
 
 
올림픽 정신은 ‘국제 평화 증진’에 있다고 하지만, 현실과 이상엔 늘 차이가 난다. 고대 그리스에서 열린 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인기 있는 경기였던 마차 경주에서 참가자들은 자신의 경제력을 과시하고, 이를 통해 권력과 영예를 얻으려 했다.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스포츠를 악용해 개인과 국가 모두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19세기 헝가리 화가 알렉산더 폰 바그너의 그림 ‘전차 경기’. 고대 로마 제국의 전차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참가자들은 전차 바퀴가 떨어질 정도로 치열하게 달린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올림픽 정신은 ‘스포츠에 의한 인간의 완성과 경기를 통한 국제 평화의 증진’에 있다고 한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은 “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염원하는 바이지만, 늘 현실은 이상과 차이가 나는 법이다.

1896년 아테네에서 개최된 제1회 근대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는 그리스 선수 스피리돈 루이스(Spyridon Louis)였다. 그가 1등으로 스타디움에 들어오자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공(장래 그리스 국왕)이 트랙으로 달려가 그를 맞았고, 관중들은 환성을 터뜨렸다. 현장에 있던 프랑스 작가 샤를 모라스는 옆자리의 쿠베르탱 남작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말한 국제주의는 민족주의를 죽인 게 아니라 더 강화시켰소.”

사실 고대 올림픽도 이상과 현실이 결코 같지는 않았다. 올림픽은 그리스 인 모두 공동으로 제우스에게 제사를 지내며 하나의 종교적·문화적 공동체에 속한다는 의식을 나누는 자리였고, 많은 웅변가가 모든 그리스인의 단합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참가 국가 간 혹은 개인 간 치열한 우승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때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냉전 상태에 있었던 기원전 420년 및 기원전 416년 올림픽 경기였을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물리친 후 아테네는 절정기를 맞았지만, 이후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놓고 스파르타와 경쟁이 극심해졌다. 이 시기에 그리스의 많은 국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라는 두 강대국 중 한 나라의 편에 서야만 했다. 그 중 엘리스(Elis, 혹은 일레이아라고도 한다)는 경제나 군사 면에서는 약소국이지만 올림픽을 주재하는 나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이 나라의 올림피아라는 곳에서 제우스에게 제사를 지내고 스포츠 경기를 벌였다(북쪽 지방의 올림푸스 산은 우연히 이름이 비슷할 뿐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엘리스는 스파르타와 국경 분쟁을 겪은 후 아테네의 동맹이 되었다. 420년 올림픽 직전 엘리스는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스파르타의 올림픽 경기 출전을 금지시켰다. 제우스에 대한 공동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문명 세계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다는 지극히 심각한 굴욕적 사태다. 한때 스파르타는 군을 동원해서 올림피아로 진격해 들어갈까 고민하기도 했다.

젊은 알키비아데스를 가르치는 소크라테스. 이탈리아와 폴란드의 화가 마르첼로 바차렐리의 1776~1777년 작. /위키피디아

고대 올림픽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기는 마차 경주였다. 2두 마차와 4두 마차 경기 두 종류가 있었다. 사실 언덕이 많은 그리스 지형에서 마차는 실제 전투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지만, 대신 의장이나 마차 경주에서 멋진 장면을 연출하는 데 최고였다.

마차 경주는 정말로 특이한 경기다. 참가자는 자신이 직접 마차를 모는 게 아니라 단지 좋은 말과 좋은 기수를 출전시키기만 하므로, 체력이나 기술의 경쟁이라기보다 경제력의 경쟁에 가깝다. 그리스 전역에서 부유하고 위엄 있는 가문에서 길러낸 40팀 정도가 경주에 참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스파르타는 전통적으로 마차 경주에서 강세를 보였다. 그런데 420년 올림픽에서 스파르타의 참여가 금지되자 리차스(Lichas)라는 인물은 동맹국 보이오티아 소속으로 참전해서 우승을 차지했다. 명백하게 금지를 어긴 게 밝혀지자 심판진은 리차스에게 채찍질을 했다. 스파르타인들이 극도로 분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음 번 416년 올림픽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경쟁이 더 격렬해졌다. 이때 아테네의 마차 경주 참가자는 알키비아데스였다. 아테네의 영웅 페리클레스의 양자이며 소크라테스와 친분이 있고 유력한 젊은 정치인이며 아테네 최고 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위한 과도한 소비 행태로 자주 구설에 오르곤 했다. 그런데 올림픽 경기에서 전무후무한 일을 했다. 마차 경주에 무려 일곱 팀을 동시에 출전시킨 것이다. 자신과 집안의 명예를 드높이고 스파르타의 기세를 꺾어 놓으려는 목적도 있으나, 동시에 정치 권력을 얻기 위함이다. 오늘날 올림픽에서 우승했다고 권력을 얻지는 않지만, 고대에는 올림픽 우승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영예를 얻는 데다가 이로 인해 군 지휘 혹은 식민 도시 통치 등의 임무를 맡기도 했다.

 

한번에 일곱 팀을 내보내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 당시 팀 하나를 내보내는 데에는 5달란트가 든다고 하는데, 1달란트는 숙련공의 9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당연히 많은 ‘협찬’을 필요로 했다. 그의 처가가 마침 말을 키우는 명가였기에 말을 제공해 주었고, 에게해의 도시 키오스는 말 사료를 대주었다. 마차 경주 참가자는 거대한 파빌리온(pavilion·임시 건물)을 세우고 이곳에서 거주하며 파티를 열었다. 이에 비해 각지에서 올림피아에 몰려온 관람객 약 8만 명은 각자 알아서 텐트를 치고 숙식을 해결했다. 알키비아데스의 파빌리온은 에페수스 시가 마련해 주었고, 제사용 고기는 키오스 시민들이, 포도주는 레스보스 시가 제공했다. 이와 같은 거액의 후원은 모두 장래를 위한 정치적 투자의 일환이었다.

권력과 영예를 위해 올림픽 전차 경기를 이용했던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군인 알키비아데스의 흉상. /위키피디아

실력 있는 일곱 팀을 참가시킨 결과 알키비아데스는 1등·2등·3등을 다 차지했다(기록에 따라 1등·2등·4등이라고도 한다). 아마 금·은·동메달을 동시에 타는 일은 역사상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승리 파티도 엄청난 규모로 거행했다. 올림픽 대회 중 절정은 소 백 마리를 잡아 제우스에게 바치는 행사인데, 의도적으로 그 역시 같은 날 파티를 열어 유사한 수준의 희생을 바쳤다. 또 고대 그리스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인 에우리피데스는 그에게 바치는 승리의 찬가를 지었다.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을까? 정반대다. 그는 올림픽 우승의 영예에 힘입어 시칠리아 정복을 위한 아테네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뽑혔으나,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정적들에게 고발을 당했다. 아테네의 공식 파빌리온보다 두 배 더 큰 건물을 짓고, 공식 행사보다 더 큰 규모의 희생을 바치는 데 든 돈이 다 어디서 왔단 말인가? 그가 이런 일을 하면서 권력을 탐하는 것으로 보건대 참주(僭主·독재 정치인)가 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게다가 술 마시고 놀다가 헤르메스 신상의 팔을 부러뜨린 사고를 친 것도 드러났고, 신성한 제의용 선박을 사적으로 사용한 일도 밝혀졌다. 알키비아데스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느끼고 적국인 스파르타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피고가 도망간 상황에서 아테네 법정은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려서, 전 재산을 몰수하고 모든 사제가 그를 저주하도록 지시했다. 스파르타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군사 작전 내용을 알려주었고, 이것이 시칠리아 원정군의 몰살을 불러온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약 10년 후인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패권을 잃었다.

순수하지 않은 목적에 스포츠를 악용하는 것은 개인에게나 국가에나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카멜레온보다 뛰어나다” 변신의 귀재 알키비아데스]

아테네서 호화 생활하다가 도피… 스파르타서 거친 생활 즐겨 탄성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는 지난날 스파르타에 가한 손해는 앞으로 충성을 다해 갚겠다고 약속했다.그는 스파르타의 생활 습관을 완전히 몸에 익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찬물로 목욕을 하고 이 나라의 검소한 보리빵과 검은 수프를 맛있게 먹었다. 그가 예전에 집에 요리사를 두고, 향수로 몸을 가꾸며, 진홍색 외투를 입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플루타르코스의 평가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카멜레온보다 변신 능력이 더 뛰어나다. 카멜레온은 모든 색으로 변하지만 흰색으로만은 변할 수 없다고 하는데 알키비아데스는 흰색으로도 변신이 가능했다.

스파르타에 있을 때에는 운동을 즐기며 검소한 생활을 하다가, 이오니아에 있을 때에는 호화롭고 쾌활한 사람이 되었고, 트라키아에서는 술독에 빠져 살았으며, 테살리아에 가면 말타기를 즐겼다. 페르시아 총독과 사귀는 동안에는 호탕한 생활을 해서 페르시아인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역사상 가장 탁월한 변신의 귀재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