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51] 7월 혁명과 언론 자유

bindol 2021. 11. 25. 18:31

프랑스대혁명 후 30년… 파리, 언론 자유를 위해 다시 봉기하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1] 7월 혁명과 언론 자유

입력 2021.10.12 03:00
 
 
 
 
 
언론 탄압에 봉기한 파리 시민들 - 23년간 망명한 끝에 왕위를 되찾은 루이 18세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자유의 남용을 방지하는 법령에 따르는 한에서’라는 단서 조항을 붙였다. 언제든 언론 자유를 억압할 구실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길 원했던 왕실과 귀족은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들에 재갈을 물리려 했다. 자유주의 세력이 의회 다수를 차지하자 국왕은 “정기 간행물의 자유를 중단시킨다”고 선포하기까지 했다. 1830년, 신문기자들의 저항을 시작으로 시민들이 일제히 투쟁에 나섰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려 했던 왕조는 결국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림은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을 담은 프랑스 화가 이폴리트 르콩트의 ‘1830년 7월 29일, 로한 거리 전투’. 카르나발레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1830년 7월 27일에서 29일까지 소위 ‘영광의 사흘(Trois Glorieuses)’ 동안 파리 시민들의 봉기로 부르봉 왕정이 무너졌다. 국왕 샤를 10세는 가족들과 함께 도망치듯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똥이 주변 국가들로 튀어 이해에 유럽 각지에서 ‘자유 만세!’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1789~1799년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 30년 만에 파리는 다시 한번 ‘혁명의 수도’가 되었다. 자유를 얻기 위한 뜨거운 투쟁의 제일선에는 언론인들이 있었다.

부르봉 가문이 왕위를 되찾은 것은 나폴레옹 체제가 몰락한 1814년의 일이다. 프랑스혁명 와중에 기요틴으로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동생이 23년의 해외 망명 끝에 루이 18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차지했다. 그는 예전의 절대왕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국민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래서 국민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내용의 ‘헌장(Charte)’을 준수하겠다고 스스로 선언했다. 헌장에서 특기할 사항 중 하나가 언론의 자유다.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출판하고 인쇄할 권리가 있다.” 다만 여기에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었다. “자유의 남용을 방지하는 법령에 따르는 한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부는 ‘남용’을 막는다는 구실로 언제든지 언론 자유를 억압할 근거를 만들어 둔 셈이다.

‘남용 방지’ 구실로 언론 자유 억압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권력을 잡고 마지막 일전을 치른 소위 백일천하 당시 국외로 도주했다가 1815년 다시 귀국한 루이 18세 정부는 훨씬 더 보수·반동적이 되었다. 게다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시기에 피신했다가 돌아온 망명귀족(émigré)들은 시대의 변화를 깡그리 무시하고 혁명 이전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무모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이들의 뇌리에는 자신들을 핍박했던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뿐이었다. 울트라(ultra)라 불리는 이 세력은 말하자면 국왕보다도 훨씬 더 강경한 왕당파였다. 전국에서 고작 10만명에 불과한 귀족·부유층 유권자들이 강경한 울트라들을 의원으로 뽑아 파리로 보냈고, 이렇게 구성된 의회는 당연히 언론 자유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검열과 사전 신고(신문사를 설립하기 전에 정부의 심사와 인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선동적인 기사’의 출판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언론 문제는 의회 내에서 뜨거운 이슈로서 계속 공방이 이어졌다. 1819년 자유주의 세력이 의회의 다수를 차지했을 때 검열, 사전 신고, 사상 범죄 등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1820년 루이 18세의 조카인 베리 공의 암살 사건 이후 분위기가 급변하여 권력을 잡은 울트라가 검열과 사전 신고를 다시 부활시켰다.

아돌프 티에르, 루이 18세, 샤를 10세

언론 문제가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그만큼 언론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의 신문 발행 부수는 모두 합쳐서 6만부에 불과했다. 대신 카페나 독서실에서 많은 사람이 돌려가며 읽거나, 혹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큰소리로 신문을 읽어주었으므로 발행 부수에 비하면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특히 중간층 이하 사람들이 신문을 접하는 기회가 갈수록 더 늘었다. 파리를 방문한 한 독일인은 시민들이 신문을 읽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신문을 읽고 있다. 마부는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부석에서, 과일 장수는 시장에서, 문지기는 수위실에서 신문을 본다. 아침에 팔레루아얄 광장에는 천 명이 손에 신문을 들고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걸어간다.” 파리 시민들은 분명 언론을 통해 정치 문제와 사회 변화에 눈떠 갔다. ‘콩스티튀시오넬’이나 ‘피가로’ 같은 정부에 비판적인 자유주의 신문들이 ‘코티디엔’ 같은 친정부 신문들에 비해 구독자가 3배나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낀 정부가 비판적 언론에 재갈을 씌우려 했다.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아르투아 공이 샤를 10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선왕만큼의 정치적 감각도 없었고, 구태의연한 반동적 정책을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예컨대 신성모독죄를 두어서 성당의 제기(祭器)를 훔친 자는 사지 절단 혹은 참수형에 처했고, 장자 상속권을 부활시켰으며, 프랑스혁명 시기에 토지를 몰수당한 지주에게 20배의 보상을 주려 했다. 보수적 문인·정치가인 샤토브리앙마저 천년 전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냐며 항의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왕실의 과도한 조치들이 역풍을 일으켜 선거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다수를 차지했다. 샤를 10세는 고루하고 유치한 왕정주의자 폴리냐크를 등용해서 이 흐름에 맞서려 했다. 의회는 소집되자 곧 현 정세에 대해 국왕에게 항의하는 결의문을 전달했고, 그러자 국왕은 지체 없이 의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선거를 다시 한 결과 역시 현 국왕에게 비판적인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직장 잃은 식자공들 가장 먼저 봉기

이 정도라면 사태를 파악하고 현명하게 대처했어야 하지만 국왕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왕정은 자살의 길로 들어섰다. 폴리냐크는 헌장 14조에 따라 입법 절차를 밟지 않은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고 선포했다. 그것이 1830년 7월 25일의 4개 칙령이었다. 의회를 다시 해산하고, 아예 정권에 유리한 방식으로 투표 방식을 개변하려 했으며, 언론 자유를 억압했다. 현재 신문들은 ‘질서의 모든 기반을 흔들고 있고’ ‘증오를 부추기며’ ‘사람들에게 권력에 대한 도전과 적대의 정신을 불어넣으려’ 한다고 비난하며, “정기 간행물의 자유를 중단시킨다”고 선포했다.

‘나시오날’지의 편집인이었던 아돌프 티에르가 저널리스트 44명의 서명을 받아 항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처한 이 상황에서 복종은 더 이상 우리의 의무가 아니다. 신문기자들이 권력에 대한 저항의 첫 번째 모범을 보여야 한다.”

경찰이 신문사들에 들이닥쳤다. 인쇄 기계를 빼앗고 사무실을 폐쇄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성명서가 실린 신문들은 널리 퍼져갔고 기자들이 시내에서 시민들에게 큰소리로 성명서를 읽고 설명해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의회 내 투쟁을 관망하던 시민들이 무도한 조치를 일삼는 부르봉 왕조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며 투쟁에 돌입했다. 신문사가 폐쇄되면 일자리를 잃을까 우려한 식자공들이 제일 먼저 경찰들과 충돌했고, 곧이어 장인(匠人)들과 점포 주인들, 학생들이 가담했다. 시내 각지에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지고 봉기의 상징인 삼색기가 휘날리더니 시민들이 ‘부르봉 왕조 타도’를 외쳐댔다. 사흘 동안의 거리 투쟁 중 시민 700명이 사망하고 2000명이 부상했고, 진압 경찰 또한 150명이 사망하고 600명이 부상했다. 결국 봉기 세력이 루브르궁과 튀일리궁을 접수했고, 샤를 10세는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다.

시민들이 폭압적인 정권을 타도하고 자유를 쟁취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의미의 자유를 원했던 것일까? ‘영광의 사흘’을 증언하는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는 연미복을 입은 중산층 시민, 노동자, 학생들이 함께 무장한 채 시가전을 벌이는 모습이 보인다. 지난 정권을 부술 때까지는 분명 상이한 계층 사람들이 함께 싸웠으나 혁명의 성과는 노동자나 학생이 아니라 ‘연미복 신사’가 차지했다. 혁명으로 공석이 된 대권의 향방은 소수 세력의 기획·공모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루이 필리프라는 의외의 인물이 권력을 잡은 후 부유한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게 된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랑스대혁명이 아니라 7월 혁명 묘사한 작품… 손에는 1816년식 육군 소총

1830년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부분). 들라크루아의 1830년 작. /위키피디아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흔히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나타낸 그림으로 오해하곤 하지만 실은 1830년 7월 혁명을 그린 것이다. 해방의 상징인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삼색기를 손에 잡은 채 맨발로 거리를 누비며 민중을 인도하는 ‘자유의 여신’은 이후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다. 주인공은 상반신 누드에 그리스 조각과 같은 얼굴 모습을 한 ‘여신’의 풍모를 보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여인의 모습도 띠고 있다. 깨끗한 피부로 표현해야 하는 고전적인 여신과는 달리 더럽혀진 피부에 땀이 흐르고 겨드랑이 털도 고스란히 그려져 있으며, 총검이 끼워진 실제의 무기(1816년 모델 육군 소총)를 잡고 있다. 비평가들이 ‘거리의 여인’ 앞에서 혐오감을 드러내서 이 그림은 오랫동안 창고에 보존되었다가 1860년에 가서야 다시 일반 관객들에게 공개되었고 20세기가 되어서야 걸작으로 재평가되었다.

여신의 지휘를 받으며 최후의 돌격에 참여한 인물 중 후일 혁명의 성과를 누린 사람은 노동자도, 가브로슈(Gavroche, 위고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리의 소년)도 아닌 연미복을 입은 신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