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새 與 정치인만 세 차례 수상? 광복회 ‘최재형賞’의 정체
[전문기자 칼럼]
김원웅씨가 회장으로 있는 광복회가 어제 추미애 법무부장관에게 ‘최재형상’을 줬다. 공적은 ‘친일파 재산의 국가 귀속 노력 인정’이란다. 고구마 삼킨 듯 속이 답답해 몇 가지 짚는다.
최재형은 함경도 머슴집 아들이었다. 1860년대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한 뒤 성공한 거부(巨富)였다. 그 돈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안중근 의사가 쓴 권총도, 사격 연습장도 그가 제공했다. 안중근 신분증도 최재형이 만든 ‘대동공보’ 기자증이었다. 최재형은 1920년 4월 4일 일본군이 우수리스크 한인촌을 습격한 ‘4월 참변’ 때 노변 총살됐다. 무덤도 없다. 그 거인(巨人)을 기리는 상을 정치인 추미애씨에게 주었다. 몇 가지 해명을 듣고 싶다.
첫째 횟수와 수상 대상이다. 광복회가 준 첫 최재형상은 2020년 5월 10일 고(故) 김상현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받았다. 명분은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민족정기 선양에 공헌’했고 ‘생존 독립운동가의 품위 유지비 지원 정책을 실현’했다는 이유였다. 상은 김 의원 아들인 김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신 받았다.
7개월 뒤인 12월 5일 광복회는 두 번째 수상자를 발표했다. 수상자는 전 국회사무총장 유인태씨였다. 명분은 ‘사무총장 재임 시 독립유공자 후손 복지 향상’과 ‘국회에 있는 광복회 카페 운영에 기여’라고 했다. 그리고 어제 또 상을 줬다. 8개월 새 세 번째고 모두 여당 정치인들이다. 광복회장 김원웅씨에게 물었더니 “우연의 일치니 트집 말라”고 했다.
최재형을 기리는 단체는 따로 있다.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이하 ‘최재형사업회’)다. 2011년 ‘최재형장학회’로 시작해 최재형 후손과 함께 추모식과 독립운동가 후손 장학 사업, 우수리스크 기념관 사업과 학술 사업을 주관해온 단체다. ‘광복회 버전’ 최재형상은 이 사업회와 상의 없이 이뤄졌다. 제정 과정도 상식에 어긋난다. 제정과 수상자 선정은 별도 정식 규정 없이 상벌위원회에서 결정했다는 것이다.
‘오리지널’ 최재형상도 따로 있다. ‘최재형사업회’는 2018년 2월 임시정부 100주년인 2019년 시상을 목표로 ‘최재형상’ 제정을 결의했다. 2019년 ‘3‧1문화재단’ 특별상(상금 5000만원)을 받은 최재형사업회는 시상 시기를 순국 100주년인 2020년으로 미루고 1000만원을 수상자에게 상금으로 주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2월 최재형사업회가 후보 추천 공고를 냈는데 바로 며칠 뒤 광복회가 ‘제1회 최재형상’을 발표한 것이다. 이 또한 우연의 일치인가. 최재형사업회는 1회 최재형상을 작년 10월 안산 고려인 동포 야학을 후원한 조영식씨에게 주었다.
최재형사업회는 “악연이 있는 듯하다”고 했다. “2017년 12월 ‘최재형선생선양기념사업회’라는 단체가 보훈처에 등록을 신청했다. 3선 의원이 명예이사장인 쟁쟁한 단체가 신청했다는 것이다.”(‘사업회’ 이사장 문영숙) 최재형사업회에 따르면 그 ‘쟁쟁한 3선 의원’이 현 광복회장 김원웅씨다. 심사 끝에 ‘쟁쟁한 단체’는 탈락하고 최재형사업회가 등록 단체로 승인됐다.
광복회장 김원웅씨는 전화 통화에서 말했다. “내가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있을 때 다른 단체에서 ‘신채호상’을 제정했다. 나는 ‘고맙다’고 했다.” 8개월 사이 세 차례 남발한 ‘최재형상'을 고마워하라는 말이었다. 김원웅씨는 사단법인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5대(2004~2017년) 회장을 지냈다. 이 단체 현 상임대표는 2회 최재형상을 받은 유인태씨다.
100여년 전인 1920년 4월 4일 밤 최재형이 말했다. “내가 도망치면 너희 모두 일본군에 죽는다. 나는 살 건 다 살았다. 너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딸 올가의 회상) 그리고 최재형은 죽었다. 삶은 장엄했고 죽음은 당당했다.
광복회는 설명해보라. 장엄하게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들먹이면서 여당 정치인에게만 주는 상을 만든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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