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326] ‘道돈不二’
불교 사찰에 들어가다 보면 문(門)이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개의 대문이 설치되어 있다. 여러 개의 문을 겹겹이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문을 하나씩 열고 들어갈 때마다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문이 여러 개일수록 점점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중 하나가 불이문(不二門)이다. ‘둘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하나라는 뜻은 아니다. ‘따로따로 둘인 것 같이 보이는데 알고 보면 둘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밑으로는 연결되어 있다. 태어남과 죽음이 둘이 아니고, 아름다움과 추함이 둘이 아니고, 선과 악이 둘이 아니다로 읽힌다. 생사가 둘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왜 죽음에 공포와 그렇게 두려움을 갖는다는 말인가? 이 공식에 대입하면 왼손과 오른손도 둘이 아니다. 오른손이 다치면 결국 왼손도 부담이 온다.
나에게 ‘불이문’의 뜻을 새기게 해준 장소가 오사카였다. 일본 오사카에 가면 ‘도톤보리’라고 하는 먹자 거리가 있다. 나는 도톤보리에 갈 때마다 길거리 가게의 의자에 앉아 꼭 일본 라멘을 먹는 습관이 있다. 한국 라면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라멘을 먹으며 밀집된 인파를 바라다보면 왠지 활력이 느껴진다. 도톤보리가 한자로는 도돈굴(道頓堀)이다. 한자 ‘道頓堀’을 일본 발음으로 읽으면 ‘도톤보리’가 된다. 라멘을 먹으며 ‘도톤보리’를 여러 번 생각하다 보니 그 진짜 뜻은 ‘도돈불이’로 다가왔다. ‘도와 돈이 둘이 아니다.’ 돈을 멀리하고 면벽참선(面壁參禪)만 한다고 해서 도가 통하는 것도 아니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도가 닦인다.
뭐가 닦인다는 말인가. 자존심이다. 돈 앞에서는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다른 상황에서는 여간해서 자존심이 잘 안 버려지지만 돈 앞에서는 자존심이 버려진다. 돈은 화염방사기이다. 화염방사기로 자존심을 지져 버린다. 간, 쓸개가 녹는다. 이 방사기 앞에 장사 없다. 돈을 벌려면 피, 땀, 눈물이라는 인간사의 3대 액체를 흘려야 한다. 3대 액체 흘리는 게 도 닦는 일이다. 절간에서 면벽만 해 가지고는 오히려 에고를 강화시킬 수가 있다. 이 세 가지 액체를 흘리면서 아상(我相·에고)이 녹아든다. 이렇게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도 ‘도’이다. 돈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 도의 경지가 나타난다. 도가 없는 자본가는 식색(食色)과 세컨드에 몰빵한다. 옆 사람이 배가 고픈지, 죽어 나가는지는 관심 없다. 돈을 벌고 쓰는 데서 도가 닦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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