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의 땅의 歷史] 왜 그는 혁명을 택하지 않았을까

bindol 2021. 12. 17. 16:04

[123] 14대 조선 국왕 이연과 조선 군인 이순신

민심과 군사력 모두 갖춘 군인 이순신… 전쟁 초부터 ‘軍神’ 추앙
’명나라 벼슬 받았다' 소문… 선조 임금 눈밖에 나… 선조 “죽여야 할 자”
고문과 수감… 백의종군… 칠천량해전 대패로 넉달 만에 사령관 복귀… 선조 “할 말 없다” 고백
명량대첩 승리 후 선조 “사소한 공에 불과”
’우리 역사가 개탄스럽다' ‘간신배들이 국정 그르쳐’ ‘군주를 섬겨야’ 이순신, 심경에 혼란 보여
종전 후 대륙은 명-청 교체, 일본은 새 막부 정권… 조선은 ‘부패 없애달라’ 한산도 주민들 청원
이순신이 원했던 세상은?

입력 2018.05.23 03:01
 
 
 
 
 

군인 이순신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계급장을 떼이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무계급으로 전투에 투입되고,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가 겪은 정신적 수모와 육체적 고통은 끔찍하다. 의문이 생긴다. 모두가 군신(軍神)이라 추앙하였으되 그 또한 인간이었다. 왜 항명을 하지 않았을까. 나라는 어지럽고 민심도, 군사도 그의 편이었는데. 우직한 군인, 이순신 이야기다. 조선 최고위 지도자인 이연(李昖) 이야기도 함께. 이연은 조선 14대 임금 선조 이름이다.

계급장 떼이던 날

서기 1597년 음력 2월 26일 조선해군 총사령관 이순신은 가덕도로 향하던 도중 사령부인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귀대했다. 통제영은 경남 통영 한산도에 있다.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체포조가 대기 중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별 넷, 대장(大將)이 계급장을 떼이고 서울로 압송됐다. 체포조 옆에는 후임 사령관이 대기 중이었다. 후임은 원균이다. 압송되기 전 이순신은 원균에게 군비(軍備) 일체를 인계했다. 한산도 병영 내에는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이 있었고 각 군함에는 총통 300자루가 탑재돼 있었다.(이상 '이충무공 행록') 다섯 달 뒤 이 병력과 군수품은 거제도 옆 칠천량 바다에 몽땅 수장됐다.

전쟁 초기 헛소문과 선조

'선전관 이순일 말이 "명나라에서 공에게 은청금자광록대부(銀靑金紫光祿大夫) 작위를 내려준다는 소문이 있더라" 하였으나 필시 헛소문일 것이다.'(난중일기 초고(草稿) 1593년 계사년 5월 5일)

전남 진도 울돌목에는 이순신 동상이 서 있다. 백의종군 끝에 복직한 조선해군총사령관 이순신 함대가‘기적적으로’일본 해군을 물리친 명량전투지다. 무수한 모함과 멸시를 이기고 이순신이 군인으로 죽었다. 과연 그는 세상을 바꾸고 싶지 않았을까.

이순신이 연전연승을 거두자 그가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소문이 이순신 본인에게까지 들어왔다. 전라좌수사로 전쟁에 임한 지 1년, 그리고 그가 전라, 충청,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기 석 달 전이다. 광록대부는 명나라 종1품이다. 그 아래로 금자광록대부와 은청광록대부가 있으니 소문 자체가 낭설이다. 종1품이었던 소문 속 벼슬은 전쟁이 진행되면서 정1품까지 올라갔다.

소문은 중앙정부에까지 들어갔다. '순신의 직품은 정1품이었으니 자연 법전(法典)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겠으나'(선조실록 1598년 11월 30일) 1793년 정조가 내린 영의정 추증 교서도 '유명수군도독(有明水軍都督)'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중국 어느 사서에도 이순신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정1품 도독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최근 그가 황제로부터 받았다는 여덟 가지 팔사품(八賜品, 보물 440호)이 황제가 아니라 조명연합군 사령관 진린 선물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장경희, '통영 충렬사 팔사품 연구', 2014)

문제는 사실 여부가 아니다. 그 소문을 선조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유능한 이기주의자, 선조

14대 국왕 이연은 유능한 인물이었다. 주위 만류를 뿌리치고 정읍 현감 이순신을 7계급 특진시켜 전라좌수사로 임명한 지도자였다. 개전 초 전황이 가망 없음을 알고 요동으로 망명 갈 꿈을 꾼, 판단이 빠른 사람이었다. 조총(鳥銃)을 스스로 역설계해 조립도 하고, 각료들과 함께 전황을 토론하는 전술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기적이었다.

전쟁이 터진 지 14일 만에 중국으로 가려는 선조에게 관료들은 "왕세자부터 결정하라"고 주장했다. 왕이 떠나면 민심을 진정시킬 수 없다고 했다.(선조실록 1592년 4월 28일) 이틀 뒤 선조는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하고 의주로 달아났다. 백성들은 경복궁을 불태워 화를 달랬다. 이후 전쟁 준비와 백성 위무는 열일곱 먹은 광해군이 책임졌다. 육지에서는 그가 팽개친 백성이 의병을 일으켰고, 바다는 그가 낙점했던 탁월한 장수 이순신이 구했다.

백성으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은 지도자는 그 분노를 군사에게 돌렸다. 의병장들과 이순신은 나라를 버린 지도자에게 분노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의병장 김덕령은 전쟁 도중 반란죄로 처형됐다. 전후 논공행상에서 퇴직 관리 출신을 제외하고는 의병장들은 한 명도 공신록에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이순신이 황제국 명나라로부터 정1품 벼슬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직한 군인, 파면되다

이순신 본인은 우직한 군인이었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뛰어넘어서(寵榮超躐) 분에 넘쳤다.'(난중일기 1595년 5월 29일) 하지만 문제가 많았다. 그에게는 무력과 민심이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선조 이연에게 없거나 그를 압도하는 덕목이었다.

1597년 2월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체포돼 고문 끝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백의종군했다. 전란 초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부대가 구해줬던 원균이 그를 모함하는 데 있는 힘을 다했다(搆誣舜臣 不遺餘力).(류성룡, '징비록')

전남 여수 고소대에 있는 타루비(墮淚碑). 부하들이 그의 전사를 애도하며 세운 비석이다.

일본으로 귀국했던 가등청정 부대가 다시 침입한다는 거짓 정보가 문제였다. 이순신은 이미 조선에 상륙해 있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선조 정부는 이 정보를 신뢰하고 공격을 명했다. 이순신은 거부했다. 선조는 그에게 세 가지 죄를 물었다. '조정을 기만해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놓아줘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을 가로채 모함한 죄'.(선조실록 1597년 3월 13일)

 

이미 두 달 전 선조는 처벌을 작심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은 청정(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如此之人 雖得淸正之頭 不可容貸)."(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날 풍경을 기록한 류성룡의 '징비록' 초고(草稿)에는 '임금이 죽이고자 원하여(上欲誅之)'라고 적혀 있다.

조선 해군총사령관이 전쟁 최전방에서 파면됐다. 모든 사람이 죽이라 찬성했지만, 판중추부사 정탁이 강력하게 사형 불가를 주장했다. 이순신은 거의 죽을 만큼 고문을 받고(栲訊幾死·이덕형, '한음문고') 백의종군 끝에 복직 명령을 받았다. 8월 3일, 출감 4개월 만이었다.

이순신의 꿈

백의종군 길, 합천을 지날 때였다. 꿈을 꾸었다. 시체가 많이 널려 있어서 밟기도 하고 목을 베기도 하는 꿈이었다.(난중일기 1597년 7월 14일) 이틀 뒤 칠천량에서 조선 해군이 전멸했다. 그리고 20일이 지난 8월 3일 경남 진주에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복직 명령을 받았다.

선전관 양호가 가져온 문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군직 임명장인 사부유서, 하나는 모친상 중인 이순신을 탈상시키고 복직시키겠다는 복귀 명령서, 기복수직교서다. 명령권자 선조가 이렇게 썼다. '이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무슨 할 말이 있겠나(亦出於人謀不臧而致今日敗衄之辱也 尙何言哉 尙何言哉).'(이순신 기복수직교서 중)

9월 7일 이순신은 장계를 올린다. '신에게는 배가 열두 척이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해 항전하겠나이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이충무공행록) 그리고 16일 명량해전에 출전해 승리했다. 150척이 넘는 적군을 물리쳤다. 그날 밤 그가 일기를 쓴다. '천행이다(天幸).' 전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러하면 이기고 저러하면 패하리라 가르쳐줬다고 했다.(9월 15일 일기) 참으로 천행이었다.

복직 후 행한 적 없는 충성 의례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백의종군 이후 단 한 번도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지 않았다. 망궐례는 국왕이 있는 궁궐을 향해 올리는 충성 의식이다. 하지만 복직 후 노량해전까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우직한 군인답지 않은 기록이 보인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난중일기 1597년 8월 12일)

정치에 대한 불만은 전쟁 초부터 있었다.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난중일기 1594년 9월 3일)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보니 개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난중일기 1596년 5월 25일)

명량대첩 이후 서해 군산 앞 선유도까지 후퇴했다가 해남 우수영에 돌아와 보니 참혹뿐이었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9일) 그 무렵 그가 독후감을 쓴다. '송사(宋史)를 읽다(讀宋史).' "무릇 신하 된 자로 군주를 섬기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夫人臣事君有死無貳)." 왜 그 참혹 속에서 죽음으로 군주를 섬겨야 한다고 썼을까. 복잡한 심리가 읽힌다.

가소로운 지도자

명량대첩 한 달 후 선조가 명나라 장수 양호를 접견했다. 덕담이 오가고, 선조가 말문을 열었다.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捕捉些少賊)은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非有大功伐)' 양호가 대답했다. '흩어진 전선을 수습해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하다.'(선조실록 1597년 10월 20일). 두 달 전 '할 말 없다'고 거듭 고백하며 복직 명령을 내리고, 그보다 다섯 달 전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던 지도자가 한 말이었다. 사소한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전투 때 전사했다.

전후 한산도

명나라는 임진왜란 종전 후 멸망했다. 대륙은 청나라가 차지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정부가 들어섰다. 1623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한산도 주민들이 집단 연명해 통제사에게 청원서를 올렸다. ‘전복과 홍삼 진상과 관아 부역이 과하여 천여 가구가 넘던 인구가 삼백으로 줄었다’고 했다.(한산도민등장·閒山島民等狀) 이순신이 기대했던 세상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