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25] 투자의 전설 조지 소로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1998년 새해 첫 공식 행사로 조지 소로스를 만났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월가의 대형 금융기관 총수도 아닌 1992년 영란은행을 무너트린 외환 투기꾼을 만나야 했던 까닭은 국제 금융시장에 대한 그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1997년 말에 발발한 외환 위기 사태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급히 구제금융을 빌려야 하는 어려운 처지였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 금융계 큰손들을 초청해 한국에 대한 투자와 외환 위기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는데 바로 그 첫 번째 인물이 조지 소로스였다.
1930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소로스는 어린 시절 독일군과 소련군의 부다페스트 시가전을 목격하며 컸다. 공습이 잦고, 전기가 끊기고,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전쟁 통에 그는 변호사였던 아버지를 도와 암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삼촌의 담배 장사도 거들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유대인임이 발각되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처지였다. 그는 야반 탈주를 감행해 런던으로 탈출했다. 런던에서 접시 닦기, 페인트공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철도 짐꾼으로 일하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9년간의 영국 생활은 배고픔과 고난의 나날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런 어려운 시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 에라스뮈스, 홉스 같은 철학자의 책들을 온 마음으로 읽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49년 수영장 안내원으로 일하면서 읽은 책이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었다. 이 책은 그를 충격에 빠트릴 만큼 날카로운 통찰로 가득했다.
그가 입학한 런던정경대학에 세계적 석학 칼 포퍼(Karl Popper) 교수가 있었다. 이 유명한 유대인 철학 교수가 소로스의 논문 지도교수였다. 포퍼 교수는 반전체주의, 반마르크스 성향의 우익 사상가이자, 양자역학 등 물리학을 철학적 분석 틀로 즐겨 사용했던 ‘과학 철학자’였다. 칼 포퍼의 사상은 소로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칼 포퍼는 “영원히 올바른 것은 없다”며 모든 기존 관념을 거부했다. 그에게 진리란 이성에 의해 비판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모든 사상은 불확실하고 인간은 반드시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므로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해 가는 열린사회(Open Society)야말로 이상적인 사회다’로 요약된다. 포퍼에 따르면 열린사회와 반대편에 있는 것이 전제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다.
포퍼는 “모든 삶은 근본적으로 문제 해결이다”라고 인간의 삶을 정의했다. 이러한 스승의 사상에 적극 공감한 소로스는 그 뒤 포퍼의 사상에 자신의 생각을 더해 ‘오류성’과 ‘상호 작용성’을 토대로 자신의 투자 개념 ‘재귀성이론’을 완성했다. ‘오류성’이란 인간은 불완전하여 세상을 인지하는 데 있어 항상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되며 전체가 아닌 부분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은 틀리기 쉬우며 다음의 전개를 예측해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곧 남은 물론 자신의 판단도 틀릴 수 있음을 항상 인정하고 투자에 임하라는 것이다. ‘상호 작용성’이란 기대와 현실 속에서 사람과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행동한다는 것이다.
“가격은 수요·공급 그리고 심리 따라 결정돼”
소로스는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서만이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의 기대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경제학에 심리학을 접목한 ‘행동경제학’은 고전학파 이론의 가정 자체가 틀렸다고 보았다. 인간은 부분적으로만 합리적이라,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판단과 행동을 가정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그 뒤 그는 고학으로 런던정경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1952년에 조기 졸업했다.
힘들게 명문 런던경제대학을 졸업했어도 그는 취직 자리를 구하지 못해 핸드백 세일즈 영업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는 헝가리 이민자가 설립한 투자회사에 취직해 증권 재정 거래(Arbitrage Transaction)를 맡았다. 원래 ‘재정 거래’란 어떤 상품의 가격이 시장 간에 서로 다를 경우 가격이 싼 시장에서 사서 비싼 시장에 팔아 매매 차익을 얻는 거래 행위를 말한다. 이를 ‘차익 거래’라고도 한다. 이는 리스크 없는 무위험 수익 거래다.
스승과 같은 철학자의 삶이 소로스의 꿈이었다. 그러려면 먼저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런던 금융시장보다는 뉴욕에서 일하는 게 돈 버는 시간을 단축할 것으로 보았다. 1956년 소로스는 “최단 시간 내에 50만달러를 벌어 그 돈으로 철학자가 된다”는 극히 이상주의적 목표를 가지고 월스트리트로 향했다. 월가에서 맡은 일도 차액 거래였다. 당시만 해도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통신 인프라가 빈약해 이른바 정보의 비대칭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런던과 뉴욕에서 거래되는 유럽 증권의 가격 차이를 이용해 그 차익을 챙기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유럽의 증권 사정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런던 증권회사에서 일했던 그는 자신의 지식을 살려 점차 이름을 알리고 신용을 구축해 갔다. 이후 그는 월스트리트의 가장 유능한 종목 발굴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철학 공부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근무시간에도 틈만 나면 철학 서적을 읽었다. 주말에는 철학과 대학원생의 개인 지도를 받았다. 이미 50만달러 이상을 모은 그는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아예 학교로 되돌아가 3년 동안 철학 공부를 더 했다.
인문고전을 읽는 천재들의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안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은 보통 보이는 것(sight)에 주목한다. 그러나 천재들은 보이지 않는 것(insight)에 주목한다. 통찰력을 의미하는 “insight”는 “sight”에 “in”이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다. 통찰력이란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소로스는 일반 군중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고 노력했다. 특히 해외로 눈을 돌렸다.
소로스 펀드, 연평균 32% 경이적인 수익률
그가 철학 공부를 더 하러 월스트리트를 떠나기에는 그 자신이 너무나 주식을 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결국 떠나지 못했다. 소로스는 1969년부터 역외펀드를 개설했고, 1971년부터 일본 주식에 투자했을 정도로 글로벌 투자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그는 헤지펀드 업계 최초로 세계시장 개척에 도전해 글로벌 투자의 원조가 되었다.
1973년 마흔셋이 된 그는 독립을 결심하고 방 두 칸짜리 소형 사무실을 얻어 창업했다. 직원은 그를 포함해 3명이 전부였다. 그의 재귀성 이론은 이른바 효율적 시장가설을 주장하는 주류 경제학파들에게는 “논할 가치도 없는 해괴한 담론”이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소로스는 1969년 펀드 운용을 시작한 이래 연평균 32%라는 경이적인 성과를 냈다.
그는 1982년에 만든 자선기금에 ‘열린사회 기금’(Open Society Fund)이라는 이름을 헌사하여 스승에 대한 예를 표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자란 동구의 민주화를 위해 매년 3억달러 이상을 기부하고 있다. 그가 이제까지 기부한 돈만 430억달러가 넘는다. 자기가 번 돈의 86%를 사회적 약자들과 동구의 민주화를 위해 내놓았다. 그의 실체가 투기꾼인지 철학자인지 박애주의자인지는 보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소로스의 투자 철학은]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존재... 투자 출발점은 겸손한 마음
세계 경제가 출렁이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새로운 바이러스의 창궐 우려도 나온다. 그간의 유동성 장세가 만든 버블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투자를 되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사람은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곧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특성이 있다. 이를 ‘확증편향’이라 한다. 그런데 투자시장에서는 이러한 자기 확신이 큰 걸림돌이 되어 크게 손해 보는 경우가 많다.
소로스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중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쓴 지도교수 칼 포퍼(Karl Popper)의 이론에 심취했다. 그리고 사회나 개인의 발전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열려 있을 때 비로소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소로스는 이 깨달음을 투자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그는 투자에 대한 자기 확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오류성’과 시장과 상호 교류에 의해 자신의 틀린 생각을 교정해 나가는 ‘상호 작용성’을 토대로 ‘시장은 극한 상황까지 가서야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재귀성 이론(theory of reflexivity)’을 완성한다. 소로스는 이 ‘재귀성 이론’을 투자에 적용해 큰돈을 벌었다. 자기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이야말로 그의 투자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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