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봄이 간다커늘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봄이 간다커늘
-무명씨
봄이 간다커늘 술 싣고 전송가니
낙화 쌓인 곳에 간 곳을 모르노니
유막(柳幕)에 꾀꼬리 이르기를 어제
갔다 하더라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노래만 남아 있는 이름 없는 가인(歌人)들
봄이 간다고 해서 술을 싣고 전송을 갔다. 낙화는 수북한 데 봄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 없다. 버드나무가 울울히 막처럼 드리워진 곳에서 꾀꼬리 울음만 들린다. 그 새가 이르기를 봄은 바로 어제 갔다고 하네. 아차 한발 늦었구나.
기지와 상상력이 번득인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명작을 지은 이의 이름을 알 길이 없다.
고시조에는 작자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작품들이 많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평민, 기녀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부른 노래(唱)였다. 시조에 이름을 남긴 기생들은 탁월한 시인이었으며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서사가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사설시조에 이르면 양반에 대한 풍자의 칼끝이 매섭다. 해학과 성적 묘사도 질탕하다. 서민들일수록 그런 식으로 노래에 시대를 담았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시조가 사대부의 음풍농월이라고 해서 인정하지 않는다. 현대시조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 조운도 월북 이후에는 자유시를 함께 써야 했다. 북한의 이런 견해는 시조의 한 면만 본 것이다. 편협한 예술관 때문에 민족시를 스스로 버린 것이다.
올봄, 참으로 넘기기 어렵다. 이러다가 이 봄도 꾀꼬리 울음과 함께 문득 가버리겠지.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도, 싸움도 결국 봄과 함께 흘러가리라.
유자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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