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섣달 그믐밤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섣달 그믐밤
최순향(1946∼)
탁본 떠서 벽에 걸듯 지난 세월 펼쳐 보다
남루가 부끄러워 두 눈을 감는다
하나님, 당신만 아소서 아니 당신만 모르소서
- 행복한 저녁
환난 속에 한 해를 보내며
아쉬워도 후회스러워도 보내야만 하는 한 해. 지난 1년을 탁본 떠서 벽에 걸 듯 펼쳐 본다. 마치 저승에 가면 나의 생애가 비친다는 명경대(明鏡臺)처럼… 살아온 세월이 부끄러워 아예 눈을 감는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 ‘당신만 아소서’라고 했다가 이내 ‘당신만 모르소서’라고 하는 말이 귀엽고도 재미있다. 보여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부끄러움을… 망설임 속에서 기어이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밤을 맞는다.
우리 생애 처음으로 겪었던 팬데믹. 새해도 한참을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해야 할 듯하다. 14세기 중세의 유럽을 초토화한 페스트는 당시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는 2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성당들도 문을 닫고 사제들은 기도에 몰두했으니 봉쇄 수도원의 기원이다. 가톨릭의 영적 성장과 그 후 일어난 종교개혁 그리고 르네상스는 페스트 패러독스라고 할만하다. 이번에도 과학이 이길 것이다. 무서운 시대,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최순향 시인은 ‘긴힛단 그츠리잇가’ ‘옷이 자랐다’ ‘아직도 설레이는’ 등의 시집을 낸 세계전통시인협회 한국본부 부회장이다. 데이빗 맥캔 전 하버드대 교수는 “쏘로우의 명상 여행들을 생각하게 된다”고 평했다.
유자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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