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짝사랑한 고종
* 유튜브 https://youtu.be/eVavfK9TQ94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04년 2월 8일 일본군이 청나라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극동함대에 어뢰를 발사했다. 러시아 전함 두 척이 대파됐다. 다음 날 일본 함대 14척이 대한제국 제물포에 입항한 러시아 바략호와 코리에츠호를 공격했다. 2월 10일 뒤늦은 일본 측 선전포고와 함께 러일전쟁이 개전했다. 그해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 땅을 군용지로 사용할 수 있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이듬해 11월 17일 일본은 ‘한일신협약(을사조약)’을 통해 대한제국 외교권을 접수했다.
이하는 그 급박하고 처참했던 1년 9개월 동안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과 일본 특파대신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오갔던 ‘대화’와 ‘금품’에 관한 기록이다. 모든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와 일본 외무성 ‘일본외교자료’에 공개돼 있다. 나라와 땅과 백성이 왜 팔려나갔는지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시간 순으로 본다.
291.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짝사랑한 고종
땡처리 중인 대한제국
전운이 감돌던 1904년 1월 10일 밤 대한제국 외부대신 이지용이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찾아갔다. 이지용은 하야시에게 “황제의 의사가 거의 확정돼 적당한 시기에 밀약을 체결할 단계에 도달했다”고 궁내 상황을 전했다. 다음 날 하야시는 이지용에게 ‘운동비’ 1만엔을 전달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12.한일의정서 (16)한일밀약 체결 예상 및 한정 회유 상황 등 보고 건) 1월 19일 이지용이 궁내부 특진관 이근택, 군부대신 민영철을 대동하고 황제 위임장 초안을 들고 하야시를 찾았다. 이들은 “생명을 걸고 본건 성립에 온 힘을 다할 작정이니 제국 정부에서도 충분한 신뢰를 해 주기 바란다”고 요구했다.(앞 책, (20)한일밀약 체결안 협의진행과정 보고 건)
2월 12일 대한제국 정부는 각 군(郡) 단위 행정구역에 ‘군내 통과 일본군에 숙박 및 군수 일체를 협조하라’고 지시했다.(’각사등록 근대편’ 연도각군안 5 훈령 제1호 1904년 2월 12일) 발신자는 외부대신 임시서리 겸 법부대신 이지용이었다. 2월 21일 역시 외부대신 이지용은 한성 판윤 김규희에게 “북진 일본군 군수품 수송을 위해 매일 인부 600명을 지체 없이 모집하라”고 지시했다.(‘한성부래거안(漢城府來去案)’1, 훈령 제1호 1904년 2월 21일) 그리고 이틀 뒤 ‘한일의정서’가 체결됐다. 체결 전 이미 나라는 팔려나가고 있었다.
30만엔, 훈장 그리고 ‘동양의 비스마르크’
1904년 2월 28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고종 본인과 두 아들인 황태자와 영친왕 이름으로 러일전쟁 군자금 명목으로 일본에 백동화 18만원을 기부했다.(일본 외무성 ‘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p273, ‘한국황제 내탕금 아군 군수 지원’) 그리고 3월 18일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알현했다. 이토는 일본 천황 메이지가 보낸 국서를 고종에게 봉정한 뒤 ‘군자금 기증에 대한 천황의 감사인사’를 전했다. 대화 도중 고종이 이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특파대사로서 오래 머물지 못하겠지만, 국정에 대해 경으로부터 들을 이야기가 많다. 그러니 짐의 최고 고문이 되어서 평상복을 입고 언제든지 짐의 자문에 답해주기를 희망한다.”(앞 책, p293, ‘3월 18일 이토 특파대사 알현시말’)
3월 20일 이토가 두 번째 고종을 알현했다. 국제 정세를 논하던 중 고종이 이렇게 이토를 추켜세웠다. “서양인들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독일 비스마르크와 청나라 이홍장과 함께 경을 ‘근세 4걸’이라 한다.” 이토가 답했다. “천황의 의지가 확고해 잘 보필한 덕분이다.”(’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p294, ‘3월 20일 이토 특파대사 내알현시말’)
다음 날 이토가 궁내부대신 민병석을 숙소인 손탁 여관으로 불렀다. 자기 숙소 옆방에서 이토가 은밀하게 제안했다. “군자금을 받은 답례로 일본돈 30만엔을 황제에게 바치려 한다.” 3월 22일 고종은 “거절은 예의에 어긋난다”며 이를 수락했다. 이토는 30만엔이 입금된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예금 통장을 민병석을 통해 고종에게 헌납했다. 24일 이토는 궁내부 철도원 감독 현운영의 처를 통해 엄비에게 1만엔, 황태자에게 5000엔, 황태자비에게 5000엔을 각각 상납했다.(앞 책, p297~298, ‘황실 금원 기증 시말’)
30만엔 헌납 이틀 뒤인 3월 24일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금척대수장을 수여했다. 국서 봉정 이틀 뒤인 3월 20일부터 25일까지 주한 일본공사관 직원 전원과 대사 수행원 전원, 이토가 타고 온 군함 함장까지 훈장을 받았다.(1904년 3월 20~25일 ‘고종실록’)
“제발 이토를 보내주시오”
3월 25일 이토가 귀국 인사차 고종을 알현했다. 이토가 말했다. “한국이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左視右顧·좌시우고) 애매한 방책을 택하면 한국에 이로운 방책이 될 수 없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불리해진다고 한국군이 총을 일본에 돌린다면 우리는 한국을 적국으로 간주할 것이다.”
긴장됐던 분위기는 곧 풀렸다. 대화가 이어지고 고종이 이렇게 말했다. “황제께서 본인이 신임하는 경을 특파해주었으니 짐과 황실과 일반 신민 모두 기뻐 마지않는다. 나 또한 경을 깊이 신뢰하니 그대 보필을 깊이 기대하겠다. 수시로 와서 유익한 지도를 해주기 희망한다.”(앞 책, p289~293, ‘3월 25일 이토 특파대사 오찬 겸 알현시말’)
그리고 넉 달이 지났다. 1904년 7월 21일 고종이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급히 불렀다. 하야시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한국 시정 개선을 위해 이토 후작을 짐이 신뢰하니 지도를 받기 위해 그를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하야시는 “이토가 추밀원 의장이며 천황의 중신이라 천황의 재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고종은 “짐이 직접 천황에게 전보를 보내겠다”고 했다.
7월 22일 고종은 심상훈과 이지용을 일본으로 파견해 이토를 초빙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다음 날 고종은 일본공사관으로 친전(親電) 초안을 보내왔다. “대한제국황제 이희는 대일본제국 황제 폐하께 짐과 뜻이 합치하는 폐하의 중신(重臣) 이토 히로부미 후작을 한국에 파견하도록 사랑을 나눠주시길 희망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친전 초안은 일본 외무대신에게 즉각 보고됐고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는 이토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p356~360)
대한제국 정부 독촉이 거듭됐지만, 이토 초청은 성사되지 못했다. 대신 일본은 한 달 뒤인 8월 22일 ‘1차한일협약’을 맺고 대장성 주세국장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를 재정고문으로 보냈다. 대한제국은 ‘한일의정서’로 국토를 넘겼고 ‘1차한일협약’으로 재정권을 일본에 넘겼다.
“그 수염 백발이 될 때까지 짐을...”
1905년 11월 17일 2차한일협약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이에 앞서 11월 11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일본 외무성 기밀 제119호에 의거해 기밀비 6만1000원을 집행했다. 기밀비는 ‘궁중 내탕금이 궁핍한’ 고종에게 이토 접대비 명목으로 2만원이, 조약 관련 궁내 인사들에게 4만1000원이 지급됐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11.보호조약 1~3 (195)임시 기밀비 지불 잔액 반납의 건) 5년 뒤인 1910년 당시 중산층인 서울 숙련 목수 연봉은 200원이었다.(김낙년 등 4명, ‘한국의 장기통계’ 1, 해남, 2018, p191)
11월 15일 고종은 조약 체결을 위해 방한한 일본 사절단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육군중장 이노우에 요시토모부터 해군 군의관 오카다 고가네마루까지 모두 65명이었다.(1905년 11월 15일 ‘고종실록’)
11월 16일 조약 협상이 진행됐다. 서울 정동에 있는 중명전 1층 회의실에서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집합시키고 일본 측 조약안을 밀어붙였다. 고종은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손상이 없다’는 내용을 첨가해야 한다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1905년 12월 16일 ‘고종실록’)
11월 28일 대한제국 외교권을 가져간 이토 히로부미가 귀국 인사차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이 말했다. “실로 우리나라를 위해 경의 재량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 경은 지금 수염이 반백이다. 오직 국사에 매진한 결과가 아닌가. 이제 일본 정치는 후임 정치가에게 맡기고, 남아 있는 검은 수염으로 힘써 짐을 보필해 달라. 그 수염이 희게 되면 우리나라에 한 위대한 공헌이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는 ‘미소를 띠며’ 불가하다고 대답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5권, 7.한국봉사기록 (2)한국파견대사 이토의 복명서) 이토는 다음 날 귀국했다.
정치학자 한상일은 “고종의 의도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다”라고 했다.(한상일,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까치글방, 2015, p251) 사학자 신복룡은 “망국의 군주가 침략의 수괴 앞에서 할 말인가”라고 물었다.(신복룡, ‘한국사에서의 전쟁과 평화’, 선인, 2021, p536)
그때까지 고종 앞으로 을사조약을 부당하다고 올린 상소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토가 고종을 알현하던 11월 28일 시종부 무관장 민영환이 두 차례 상소를 했다. 고종은 “왜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구는가”라며 이를 물리쳤다. 다음 날 이토가 한국을 떠났다. 그다음 날 민영환이 자결했다. 그리고 12월 1일 민영환과 함께 연명 상소했던 조병세가 자결했다.(1905년 11월 28일, 30일, 12월 1일 ‘고종실록’)
1909년 비 내리던 여름날
1909년 7월 6일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으로 돌아가며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되고 덕수궁에 살고 있었다. 비가 내렸다. 고종이 人(인), 新(신), 春(춘) 세 글자로 시제(詩題)를 내리니 통감 이토와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오노리(森大來),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시를 썼다.
‘단비가 처음 내려 만인을 적셔주니(甘雨初來霑萬人·감우초래점만인: 이토) / 함녕전 위 이슬이 새롭다(咸寧殿上露革新·함녕전상로혁신: 모리) / 부상(일본)과 근역(한국)을 어찌 다르다 하리오(扶桑槿域何論態·부상근역하론태: 소네) / 두 땅이 하나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兩地一家天下春·양지일가천하춘: 이완용)’ 1935년 덕수궁 정관헌 옆에 시를 새긴 비석이 건립됐다. 비석 뒷면에는 ‘태황제께서 크게 기뻐하였다(大加嘉賞·대가가상)’고 적혀 있었다.(오다 쇼고, ‘덕수궁사(德壽宮史)’, 이왕직, 1938, p73~74)
나라 땅이 군화 자국으로 도배되던 순간 이토 히로부미를 비스마르크에 비견하던, 충신들이 자결하며 상소를 올릴 때 검은 수염을 자기를 위해 써달라고 부탁하던 황제 이야기였다. 저 비석은 해방 후 땅에 묻혔다. 지금도 묻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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