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만물상] 사탄의 마차

bindol 2022. 3. 3. 03:51

[만물상] 사탄의 마차

입력 2022.03.03 03:18
 

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 제2 도시다. 지난 1일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민간인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시 청사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이는 장면이 전 세계로 퍼졌다. 외신들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민간인 주거지를 무차별 공격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군 행렬엔 ‘사탄의 마차’ ‘악마의 무기’라 불리는 열압력탄 발사 차량이 눈에 띈다. 도시 말살용 무기다. 푸틴은 과거 체첸에서 이 무기를 쏜 전례가 있다.

▶1994년 당시 옐친 대통령은 체첸의 분리 독립을 저지하고자 기계화 군을 보냈다가 처참하게 패퇴했다. 전차 62대와 장갑차 163대를 잃었다. 체첸 수도 그로즈니 진입 60시간 만에 장갑차 42대와 전차 20대를 잃고 전멸한 여단도 있다. 구조적으로 전차 포로는 높은 곳에 있는 적을 쏘지 못한다. 체첸 반군은 건물로 올라가 위에서 휴대용 대전차포를 쏟아부었다. 러시아 전차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러시아는 도심 시가전에 대한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열압력탄이다.

▶1999년 2차 체첸 전쟁이 발발하자 푸틴은 폭격으로 그로즈니 건물부터 잿더미로 만들었다.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했는지, 지금도 포격 전후 도시를 비교하는 항공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열압력탄도 이때 등장했다. 러시아군은 반군을 향해 TOS-1M 다연장 로켓 발사대로 열압력탄을 한꺼번에 30발씩 쏘았다. 방공호에 몸을 피한 민간인도 무차별 살상 당했다.

 

▶열압력탄은 주변 산소를 빨아들여 초고속 폭발을 일으키기 때문에 ‘진공 폭탄’으로도 불린다. 폭심(爆心)에서 살상력이 뻗어나가는 게 아니라 먼저 가연성 분진을 퍼뜨린 뒤 폭발하므로 엄폐물 뒤에 숨어도 소용없다. 폭발할 때 발생하는 높은 압력으로 내장이 파열돼 즉사하거나 화염에 휩싸여 순식간에 타 죽는다. 당시 체첸 민간인 3만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중 5000명은 어린이였다.

▶그로즈니는 러시아어로 ‘(번개처럼) 무섭다’는 뜻이다. 무시무시한 통치자였던 이반 4세의 별명이 ‘이반 그로즈니(뇌제)’다. 푸틴도 체첸을 파괴한 뒤 ‘푸틴 그로즈니’로 불렸다. 이후 10년에 걸쳐 그로즈니에서 전쟁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졌다. 폐허였던 도심에 거대한 모스크가 들어섰고 초고층 건물이 주변을 에워쌌다. 그러나 깨끗한 대신 자유도 독립도 없다. 수만 명 시신 위에 세워진 이 모습에서 공포를 느끼게 된다. 지금 우크라이나인들은 ‘악마의 무기’ 앞에 서 있다. 그들의 조국이 또 다른 ‘그로즈니’가 될 수도 있는 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