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19세기 ‘사회주의 낙원’ 그린 소설… 미국은 왜 열광했나

bindol 2022. 3. 15. 04:38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9] 유토피아 (下) 벨러미가 쓴 ‘뒤를 돌아보면서’

입력 2022.02.08 03:00
 
 
19세기말 자본주의 폐해를 그린 미국의 풍자화 - 에드워드 벨러미는 1888년 출간한 ‘뒤를 돌아보면서(Looking Backward 2000-1887)’를 통해 자본주의 발전은 국가 자본주의로 귀결돼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모든 책임을 지는 이상 사회를 그려냈다. 19세기 중산층은 노동자들의 참담한 상황이 개선되기를 바라면서도 파업을 일삼는 노동 계급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도 갖고 있었다. 사진은 소수의 자본가가 다수 노동자를 이용해 배를 불리는 자본주의 폐해를 묘사한 1883년 미국의 풍자만화. /미 의회도서관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은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과 극심한 사회 갈등이다. 이런 문제를 말끔히 해소하여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가 과연 가능할까? 에드워드 벨러미(Edward Bellamy·1850~1898)의 ‘뒤를 돌아보면서(Looking Backward 2000-1887)’는 그런 이상이 실현된 미래 사회를 그린 작품이다.

1888년 이 책을 출판할 때 작가는 자기 작품이 얼마나 엄청난 성공을 거둘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출판 첫해에만 이미 6만부가 팔렸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세계적으로 600만부가 팔리면서 세계 각지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에서 그리는 미래 사회가 너무나 그럴듯해서, 저자의 뜻을 추종하는 ‘벨러미주의자(Bellamyite)’들이 전국적으로 클럽들을 결성하고는 이 책 내용을 현실에서 그대로 실천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이런 초유 사태가 벌어진 것일까?

불면증에 시달리던 주인공 줄리언 웨스트(Julian West)는 최면술을 이용한 특별 요법을 받고 지하실에서 잠이 들었는데,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그 상태 그대로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무려 113년이 지난 서기 2000년, 그리하여 19세기 인물이 21세기 미래 사회를 보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이때 미국은 사회주의 천국으로 변해 있었다. 주인공은 꿈이 실현된 미래 사회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의 자본이 온 세상을 장악

미국은 어떻게 해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을까? 벨러미의 상상에 따르면 그 과정은 자본주의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무한 경쟁이 계속되면 자본가 중 누구는 승리하고 누구는 몰락하여 갈수록 소수만 남게 된다. 이후에도 거대 재벌들 간 극한 경쟁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다 보니 급기야 단 하나만 살아남아 나머지 모든 자본을 다 흡수한 최후의 독점이 된다. 이렇게 남은 유일 자본은 스스로 국가가 되었다. 한 국가, 한 자본, 한 고용주가 온 세상을 장악한 것이다.

폭력적 혁명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가 갈수록 강력해지다 보니 결과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로 전환한다는 전망이다. 그렇게 완성된 국가 자본주의에 대해 다른 사상가들이라면 파렴치한 국가기구의 옹호 아래서 사악한 자본가가 인민의 고혈을 쥐어짜는 지옥 같은 세상이 되리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그런데 벨러미는 최종 독점 단계가 오히려 이상적 사회가 되리라는 정반대 견해를 제시한다. 이때까지 경쟁이 인간 사회를 피폐하게 했는데, 마지막 단계에 이르니 더 이상 경쟁이 없어져서 거꾸로 사회적 연대가 강화되고, 그동안 극도로 발전한 과학기술과 산업의 힘으로 이루어낸 물질적 성과는 모든 사람이 골고루 누리게 된다는 설명이다.

벨러미와 그를 비판한 모리스 - 에드워드 벨러미(왼쪽)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사회주의 유토피아로 구현될 것이라는 구상을 소설에 담았다. 이를 ‘중산층 응석받이’라고 비판한 윌리엄 모리스(오른쪽)는 국가가 사라진 사회를 이상향으로 제시했다. /위키피디아

산업은 완전히 국유화되었다. 국가-자본에 고용된 사람들은 옛날처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짧은 시간만 일한다. 엄청난 과학기술 발전으로 생산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노동 조직을 군대 방식으로 운영한다는 것이다. 이름도 산업군(産業軍·industrial army)이다. 모든 사람은 21세에 산업군에 들어가 24세까지 일을 배우면서 자기에게 맞는 일을 탐색하다가 취향에 맞는 직업을 최종 결정한 후 45세까지 근무한다. 그 후 은퇴하여 편안하게 인생 2부를 즐기며 살아간다. 누구나 동일한 임금을 받되, 다만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힘들거나 위험한 일을 하면 노동시간을 줄여주는 식으로 보상한다.

완벽한 계획경제하에 국가가 생산과 배급의 담당자로서 국민에게 필요한 물품을 충분히 공급한다. 시민 모두 똑같은 구매력을 가지고 있으니 부자들만을 위한 생산 같은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과도한 낭비나 과시 소비도 없어질 테고, 노후를 대비해 죽어라 일하며 저축할 필요도 없다. 국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기 때문이다. 평생 힘들게 모은 재산을 아들딸에게 물려주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므로 유산 상속도 사실상 없어진다. 돈을 빼앗으려는 절도와 강도가 없을 테니 범죄도 거의 사라지고, 따라서 교도소도 극소수 범죄자나 정신병자를 가두는 용도로만 일부 남아 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서기 2000년에 미국이 사회주의 천국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왜 예측이 틀렸냐고 저자에게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작가가 왜 이런 구상을 했는가, 작가의 전망이 우리에게 어떤 점을 일깨워주는가를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한편으로 19세기 중산층은 당시 노동자들의 참담한 상황을 보고 이들의 처우가 개선되기를 바라 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반복되는 파업과 봉기에 넌더리를 냈고, 노동 계급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 빠졌다. 중산층은 노동 계급의 혁명 운동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사실 노동 계급 자신도 자본주의 체제를 파괴하고 난 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확실한 전망이 없었다.

 

개인의 행복은 국가 통제로 못 얻어

이런 상황에서 벨러미가 제시한 중간의 길이 엄청난 호응을 얻은 것이다. 생산 수단 국유화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목표를 공유하되, 파괴적 혁명을 피하고도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하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사회주의 천국의 이념이 미국 중산층의 꿈과 만난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다” 소련 현실 꼬집은 그림 - 소련을 풍자한 프랑스 만평에서 남루한 옷차림의 해골이 ‘우리는 매우 행복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1935년 프랑스 신문에 실린 이 만평에는 ‘소비에트 천국’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뒤를 돌아보면서’는 철학자 존 듀이,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 여성주의 작가 샬럿 질먼 등 많은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으나, 물론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과연 계획경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할 것인가? 그런 체제가 정말로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인가? 이런 의문에 대해 현실에서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다. 역설적이지만 미국 중산층 작가의 상상과 매우 유사한 체제가 스탈린 시대 소련에서 실현된 것이다. 전권을 잡은 국가기구가 모든 경쟁을 억압하고 군사적 방식으로 통제하는 계획경제는 벨러미의 구상과 판박이로 같다. 이 체제는 결코 행복한 사회를 이루지 못했고, 정반대로 지극히 억압적 전제주의로 귀결되고 말았다.

왜 많은 지식인과 다수 시민이 드디어 찾아냈다고 열광했던 해결책이 현실에서는 최악의 억압 체제로 귀결되었을까? 아마도 인간 본성과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행복을 우리 스스로 찾아내지 않고 국가에 의탁한 데서 원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우리에게 기본 소득과 용돈 나누어주고, 일자리 만들어서 고용하고, 부족한 물품 나누어준다고 해서 시민들은 만족하지 않는다. 내 소중한 삶을 왜 국가가 나서서 규정하고 명령을 내리려 하느냐는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하다.

벨러미가 노동 조직을 군대식으로 짠 점에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시민들의 직업을 군대에서 보직 배정하듯 정하는데, 이러지 않고 자율적으로 맡겨서는 계획경제가 잘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에서는 시민들이 짧은 시간 일하면서도 풍족한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만족하며 사는 것처럼 그리지만, 현실에서는 그와 같은 방식에 불만족인 사람이 차고 넘칠 것이다. 국가기구는 오직 보조적 도움을 주는 데 그쳐야 한다. 내 삶의 주체가 나 자신이 아닌 사회는 ‘천국’이 되기는 애초에 글렀다. 흔히 그러하듯 잘못된 유토피아 기획은 디스토피아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영국 모리스, 벨러미 비판]

“중산층 응석받이 소설… 혁명적 파괴 없이는 새로운 체제 조성 불가능”

영국의 미학자·사회주의운동가인 윌리엄 모리스(1834~1896)는 벨러미의 책에 대해 ‘중산층 응석받이(cockney) 사회주의’라며 비판했다. 우선 혁명적 파괴 없이 새로운 체제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모리스 자신의 유토피아 저작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우리나라에서는 ‘에코토피아 뉴스’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에서는 엄청난 유혈 투쟁의 결과 새로운 체제가 등장하는 것으로 그린다. 그렇게 하여 이루어낸 이상적 사회 체제 모습 역시 벨러미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벨러미는 국가가 모든 것을 챙겨주는 이상 사회를 그린 데 비해 모리스는 국가가 사라진 사회를 그렸다. 국가와 대자본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는가? ‘이웃’이라고 그는 답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시장에 내다 팔 저급한 쓰레기 상품을 대량으로 만들지 않고 나 자신이 쓰거나 내 이웃에게 선물할 물품을 수작업으로 정성껏 만든다. 공장이 사라지고 난 후 자연은 원래의 순수함을 되찾는다. 말하자면 그는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파괴한 다음 이전 시대인 중세로 역주행한 것이다. 아름답기는 하되 실현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순진한 그의 이상주의는 ‘거대한 바캉스 계획’ ‘영국판 디즈니랜드’라는 비아냥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