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임금 향한 충절과 나라 걱정… 짧은 운율에 담아냈어요
입력 : 2022.03.17 03:30
권력을 내려놓고, 정치를 걱정하고
'나는 왕손인데, 내가 아니라 내 동생이 왕이 됐다.' 이건 누구 얘기일까요?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1454~ 1488)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추존왕 덕종)와 숙부(예종)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다음 임금이 된 사람은 아우인 9대 성종이었죠. '왕의 형'은 조금이라도 권력에 마음이 있다는 걸 보인다면 몹시 위험해지는 자리였습니다. 이 때문인지 그는 풍류 생활을 즐기며 이런 시조를 읊었습니다. "추강(가을 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오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무심한 달빛'과 '빈 배'는 권력욕을 내려놓은 사람의 허허로운 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조선 19대 임금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1629~1711)은 당시 남인에게 맞선 서인 세력의 주요 인사였습니다. 숙종의 왕비였던 인현왕후는 서인, 장희빈은 남인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왕비가 바뀔 때마다 정치권은 물갈이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1701년(숙종 27년) 숙종이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릴 때 남구만은 '무거운 형벌은 지나치다'며 동정론을 펼치다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의 유명한 시조가 있죠. "동창(동쪽 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지저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아직) 아니 일었느냐/ 재(고개) 너머 사래(이랑)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권력을 잃은 정치인이 낙향해 평화로운 시골 생활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동창'이란 동쪽 해, 즉 숙종을 말하는 것이고 '노고지리'는 조정 대신, '소'는 백성, '아이'는 관리를 비유했다는 겁니다.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소리 높여 떠드는 사이 목민관은 백성을 돌보지 않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걱정을 '언제 갈려 하나니'에 표출했다는 것입니다.
충절과 절개를 노래한 사람들
조선 6대 임금 단종은 어린 나이에 숙부 수양대군(세조) 때문에 옥좌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때 충절을 지키고 단종을 복위(다시 임금 자리에 오름)시키려다 실패하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사육신인데요. 그중 성삼문(1418~1456)은 이런 시조를 읊었습니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전설 속의 산) 제일봉에 낙락장송(가지가 늘어지고 키가 큰 소나무)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하늘과 땅에 가득 참)할 때 독야청청(홀로 푸르름)하리라." '백설'로 상징한 수양대군의 권세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이라도 끝까지 절개를 지키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훗날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되는 이방원(1367 ~1422)이 고려 말 지었다는 '하여가'예요. 신진 사대부였던 정몽주(1337~1392)는 고려를 망하게 할 수는 없다며 이성계 세력에 맞섰습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정몽주를 만난 자리에서 '하여가'를 불러 회유하려 했죠. 정몽주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읊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티끌과 흙)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변치 않는 마음)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뜻을 알아차린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그를 암살했고, 고려는 멸망하고 맙니다.
유교 이념에 억눌렸던 감정을 표현하기도
조선 시대의 국가 이념은 유교, 그중에서도 성리학이었어요.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웠고, 여성이 사랑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을 '음란하다'고 여기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낮은 신분의 여성이 감정을 뛰어나게 표현한 시조를 쓰기도 했습니다. 16세기 개성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였는데요. 그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연모의 감정을 은근하게 드러낸 시조가 있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고운)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는 대(大)학자인 화담 서경덕의 제자가 됐다는 얘기도 있어요. 서경덕과 황진이, 박연폭포를 '송도삼절'이라 불렀답니다. '개성의 세 가지 빼어난 존재'란 뜻이죠.
['단심가' 원작자는 백제 여인?]
'단심가'는 정몽주가 지은 시조가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노래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역사학자 신채호(1880 ~1936)에 따르면 고구려 22대 임금 안장왕(재위 519~531)이 태자 시절 백제에 잠입했다가 개백현(지금의 경기 고양)에서 한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태자가 돌아간 뒤 개백 태수가 한주의 미모에 빠져 아내로 삼으려고 하자 한주는 '단심가'를 읊어 절개를 지키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거죠.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군사를 일으켜 개백을 점령하고 옥에 갇힌 한주를 구출했다는 얘기입니다. 이 스토리가 '춘향전'의 원전이 됐을 거라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조(時調) 속의 역사
▲ /그래픽=유현호
우리나라 첫 시조집인 '청구영언(靑丘永言)'이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고 해요. '청구'는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의 별칭으로 쓰던 말이고, '영언'은 시와 노래라는 뜻이에요. '청구영언'은 1728년(영조 4년) 시조 작가 김천택이 여러 인물이 지은 시조 580수를 수록해 낸 책이죠. 시조(時調)란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형시로, 대개 초장·중장·종장의 3장에 45자 내외로 이뤄지죠. 그런데 유명인의 시조에는 그가 활동했던 시기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걸 모르면 내용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답니다.권력을 내려놓고, 정치를 걱정하고
'나는 왕손인데, 내가 아니라 내 동생이 왕이 됐다.' 이건 누구 얘기일까요?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1454~ 1488)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추존왕 덕종)와 숙부(예종)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다음 임금이 된 사람은 아우인 9대 성종이었죠. '왕의 형'은 조금이라도 권력에 마음이 있다는 걸 보인다면 몹시 위험해지는 자리였습니다. 이 때문인지 그는 풍류 생활을 즐기며 이런 시조를 읊었습니다. "추강(가을 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오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무심한 달빛'과 '빈 배'는 권력욕을 내려놓은 사람의 허허로운 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조선 19대 임금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1629~1711)은 당시 남인에게 맞선 서인 세력의 주요 인사였습니다. 숙종의 왕비였던 인현왕후는 서인, 장희빈은 남인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왕비가 바뀔 때마다 정치권은 물갈이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1701년(숙종 27년) 숙종이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릴 때 남구만은 '무거운 형벌은 지나치다'며 동정론을 펼치다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의 유명한 시조가 있죠. "동창(동쪽 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지저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아직) 아니 일었느냐/ 재(고개) 너머 사래(이랑)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권력을 잃은 정치인이 낙향해 평화로운 시골 생활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동창'이란 동쪽 해, 즉 숙종을 말하는 것이고 '노고지리'는 조정 대신, '소'는 백성, '아이'는 관리를 비유했다는 겁니다.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소리 높여 떠드는 사이 목민관은 백성을 돌보지 않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걱정을 '언제 갈려 하나니'에 표출했다는 것입니다.
충절과 절개를 노래한 사람들
조선 6대 임금 단종은 어린 나이에 숙부 수양대군(세조) 때문에 옥좌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때 충절을 지키고 단종을 복위(다시 임금 자리에 오름)시키려다 실패하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사육신인데요. 그중 성삼문(1418~1456)은 이런 시조를 읊었습니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전설 속의 산) 제일봉에 낙락장송(가지가 늘어지고 키가 큰 소나무)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하늘과 땅에 가득 참)할 때 독야청청(홀로 푸르름)하리라." '백설'로 상징한 수양대군의 권세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이라도 끝까지 절개를 지키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훗날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되는 이방원(1367 ~1422)이 고려 말 지었다는 '하여가'예요. 신진 사대부였던 정몽주(1337~1392)는 고려를 망하게 할 수는 없다며 이성계 세력에 맞섰습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정몽주를 만난 자리에서 '하여가'를 불러 회유하려 했죠. 정몽주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읊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티끌과 흙)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변치 않는 마음)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뜻을 알아차린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그를 암살했고, 고려는 멸망하고 맙니다.
유교 이념에 억눌렸던 감정을 표현하기도
조선 시대의 국가 이념은 유교, 그중에서도 성리학이었어요.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웠고, 여성이 사랑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을 '음란하다'고 여기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낮은 신분의 여성이 감정을 뛰어나게 표현한 시조를 쓰기도 했습니다. 16세기 개성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였는데요. 그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연모의 감정을 은근하게 드러낸 시조가 있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고운)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는 대(大)학자인 화담 서경덕의 제자가 됐다는 얘기도 있어요. 서경덕과 황진이, 박연폭포를 '송도삼절'이라 불렀답니다. '개성의 세 가지 빼어난 존재'란 뜻이죠.
['단심가' 원작자는 백제 여인?]
'단심가'는 정몽주가 지은 시조가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노래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역사학자 신채호(1880 ~1936)에 따르면 고구려 22대 임금 안장왕(재위 519~531)이 태자 시절 백제에 잠입했다가 개백현(지금의 경기 고양)에서 한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태자가 돌아간 뒤 개백 태수가 한주의 미모에 빠져 아내로 삼으려고 하자 한주는 '단심가'를 읊어 절개를 지키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거죠.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군사를 일으켜 개백을 점령하고 옥에 갇힌 한주를 구출했다는 얘기입니다. 이 스토리가 '춘향전'의 원전이 됐을 거라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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