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없는 술이라도 끓인 차보다 낫고, 거친 베옷이라도 없는 것보다 나으며,
못생긴 마누라, 못된 첩도 독수공방보단 낫지.
꼭두새벽 입궐 기다리며 신발에 서리 잔뜩 묻히느니,
삼복날 해 높이 솟도록 시원한 북쪽 창 아래 푹 자는 게 낫지.
화려한 의식으로 만인의 호송 받으며 북망산으로 가느니,
남루한 누더기 걸치고 홀로 앉아 아침 햇살 쬐는 게 낫지.
생전엔 부귀 누리고 죽어선 문장 남기려 하지만 백년도 한순간이요,
만년도 바삐 지나는 것을.
충절의 백이숙제(伯夷叔齊)든 대도 도척(盜척)이든 실패한 건 매한가지니,
차라리 지금 술에 취해 시비나 애환 다 잊는 게 낫지.
薄薄酒, 勝茶湯,
麤麤布, 勝無裳,
醜妻惡妾勝空房.
五更待漏靴滿霜,
不如三伏日高睡足北窓凉.
珠襦玉柙萬人相送歸北邙,
不如懸鶉百結獨坐負朝陽.
生前富貴, 死後文章,
百年瞬息萬世忙.
夷齊盜跖俱亡羊,
不如眼前一醉是非憂樂兩都忘.
―‘맛없는 술(박박주·薄薄酒)’ 소식(蘇軾·1037∼1101)
한 가난뱅이 선비가 ‘맛없는 술도 차보다 낫고,
못생긴 마누라도 독수공방보다는 낫다’고 떠들어댄 모양이다.
이 말에 시인은 저속하긴 해도 통달에 가까운 경지라며 시의(詩意)를 보충하고 나섰다.
그래도 비유가 점잖지 못하다 싶었던지 시 앞에 우스개 삼아 지었다는 주를 달았다.
술과 차, 벼슬살이와 은거 등 세간의 통념을 뒤집는 시인의 발상은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절대 자유를 지향했던 장자(莊子)와 닮아 있다.
도연명처럼 시인은 장자에 심취했고 삶과 시에 그 사상을 녹여냈다.
다만 관직 대신 전원을 택한 도연명과 달리 소식은 격심한 부침을 겪으면서도 관직은 고수했다.
장자와 도연명을 흠모하되 상상 속 은퇴만으로 자신을 달랜 것이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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