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전국시대 한(韓)의 공자였던 한비(韓非)는 한자(韓子)라 불렀지만 훗날 대유로 이름을 날린 당의 한유(韓愈)와 구별하기 위해 한비자(韓非子)라고 불렀다. 순경(荀卿)의 문하에서 나중에 진(秦)의 재상이 된 이사(李斯)와 함께 공부했다. 이사가 일찍이 출세의 길을 찾아갔던 것에 비해 말더듬이였던 그는 문장으로 이론체계를 세워 법가의 집대성자가 됐다. 대부분 중국 고전은 저자가 죽은 후에 빛을 봤지만, 유일하게 그의 저술만은 생존 당시에 진시황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주목을 받았다. 한비의 사상은 중국을 통합하려던 진시황의 생각과 부합됐다. 진의 승상으로 출세한 이사는 불안해졌다. 동문수학한 친구가 잠재적 정적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이사의 건의에 따라 진이 한을 공격하자, 다급해진 한왕은 한비를 진에 파견했다. 한비는 진왕의 부름을 기다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진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비가 곧바로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진왕은 이사를 불러서 한비가 진으로 온 후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었다. 이사가 대답했다. “한비는 대단한 인재지만, 재능을 믿고 오만합니다. 폐하를 뵙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화가 난 진왕이 한비를 하옥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옥리에게 정중하게 대접하라고 명한 다음 그가 마음을 돌릴 때까지 기다렸다. 진왕 영정은 인재활용능력이 뛰어났다. 통일대업이라는 야망을 품고 있던 그는 각국의 인재들을 등용했다. 그러나 ‘반축객령’을 통해 출신을 가리지 말고 능력에 따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사는 갑자기 나타난 한비라는 경쟁자에게는 다른 잣대를 적용했다. 역사는 이사가 한비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 음모를 꾸몄다고 했지만 반드시 그러한 개인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한비는 능력도 뛰어났지만 한의 귀족으로 자기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진의 국익을 위해 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사 정도의 인물이 단순히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진왕도 인정하는 한비를 죽이는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진왕이 한비를 등용하면 정치적 노선을 두고 충돌이 불가피했다. 게다가 날카로운 안목을 지닌 진왕이 자신을 의심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위험하게 된다. 이사는 빨리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한비와 원수지간인 요가(姚賈)를 부추겨 옥중에서 한비가 진왕을 비난한다고 참언하게 했다. 진왕은 불같이 화를 냈다. 이사가 건의했다. “한비는 결국 한나라 사람입니다. 자기 나라를 돕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고민하던 진왕은 한비를 죽이라고 명했다. ‘세난’에서 설득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갈파했던 한비는 결국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인간의 냉혹한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한비가 이사에게 대처하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사는 자신의 정치적 방략을 안심하고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잠재적인 정적이 사라진 것은 부수적인 소득이었을 뿐이다. 그가 유능한 사람을 질투심 때문에 살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한비를 죽인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비가 이사의 음모로 죽었기 때문에 업적만으로 두 사람의 능력을 비교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진왕이 6국을 병합하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군현제를 실시한 것이나 문자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한 것은 모두 이사의 공이다. 반축객령에 나타난 이사의 식견은 ‘한비자’처럼 방대하고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당대 최고의 정치적 식견을 가졌던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은 변한다. 어렸을 때 볼품없는 사람이었더라도 어떤 계기로 분발한다면 충분히 유능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순경에게 공부할 때 두 사람의 능력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까지 그대로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판이다. 게다가 순경의 평가가 반드시 옳았다고 할 수도 없다.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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