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3] 체코 일부 떼어주면 만족?… 히틀러, 평화협정 깨고 2차대전 도발

bindol 2022. 4. 13. 04:03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3] 체코 일부 떼어주면 만족?… 히틀러, 평화협정 깨고 2차대전 도발

나약한 평화주의 ‘뮌헨 회담’

입력 2022.04.12 03:00
 
 

1938년 9월 30일,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를 태운 비행기가 뮌헨을 떠나 파리 인근 부르제 공항으로 향했다. 총리는 마음이 무거웠다. 전날 뮌헨회담에서 영국 총리 체임벌린과 함께 히틀러의 야심을 일시적으로 무마하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라는 나치 독일 측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할 즈음, 공항에 수만 군중이 운집한 것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불명예스러운 양보를 한 데 대해 시민들이 거세게 항의하려고 모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를 본 군중은 박수를 보내며 평화를 지켜주어 감사하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현장에 있던 증인들 말로는 달라디에 총리가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멍청한 놈들(Les imbéciles).” 사르트르는 그의 작품 ‘유예(Sursis)’에서 달라디에가 조금 더 심한 말을 한 것으로 각색했다. “천치 같은 놈들(Les cons).”

뮌헨회담 참석한 체임벌린·달라디에·히틀러·무솔리니 - 1938년 9월 30일 뮌헨 회담에서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분리해 독일에 합병하기로 합의했다. 영국과 프랑스인들은 이 회담으로 평화가 보장된다고 여겼지만, 이듬해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사진은 뮌헨회담에 참석한 영국 체임벌린(앞줄 맨 왼쪽부터) 총리, 프랑스 달라디에 총리, 독일 히틀러 총통, 이탈리아 무솔리니 총리. /게티이미지코리아

다음 날인 10월 1일, 드골은 부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프랑스인들이 경솔하게 환희에 차 있는 동안, 기고만장한 독일군은 우리의 동맹이며 우리가 국경을 지켜주기로 한 나라의 영토로 행진해 들어갈 참이오. 우리는 갈수록 더 후퇴와 굴욕에 길들여져서 제2의 천성(天性)이 될 거요. 결국은 고배를 들 게 틀림없소.” 그의 예언은 곧 현실이 되었다.

뮌헨회담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1938년 3월 12일 히틀러가 무력으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1차대전 패전으로 자부심에 큰 손상을 입었던 독일 국민들이 열광하였다. 그들은 위대한 독일 제국 건설 꿈에 젖었다. 히틀러는 곧 체코슬로바키아에 눈독을 들였다. 이 나라에는 약 350만명의 독일계 주민이 수데텐란트 중심으로 모여 살고 있어서 독일의 팽창 정책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큰 부담이 되었다. ‘주데텐(Sudeten) 독일당’의 콘라트 헨라인(Konrad Henlein)은 이 지역의 자치권을 주장해 오다가 1938년 3월 이후 히틀러와 밀통하여 아예 독일과 합병하기를 획책했다. 헨라인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받아들이기 힘든 무리한 요구를 했고, 히틀러는 독일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력 침공을 할 것처럼 위협했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독일을 견제하려 했으나 히틀러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평화를 갈구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국내 여론이 너무 거셌다. 양국 언론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점차 히틀러에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독일계 주민들에게 양보하는 게 옳다는 식의 기사들이 등장했다.

영국 체임벌린 총리는 뮌헨회담을 마치고 귀국 당일 공항에서 협정서를 높이 들어 보였다. /위키피디아

여론에 밀린 두 나라 정부는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양보를 종용했다. 수데텐란트에 자치권을 부여하라고 권고하고, 9월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직접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에게 이런 사실을 통보하였다. 양국 언론은 체임벌린이 평화의 사도라며 찬미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히틀러는 과연 이런 제안에 만족하고 침공을 멈추려 했을까? 그런 기대는 순진한 환상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더 센 요구를 들고나왔다. 수데텐란트의 즉각 합병뿐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폴란드와 헝가리에도 영토를 할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분명 지나친 요구였다. 9월 23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에 맞서 히틀러는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선동적 연설을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누구도 보지 못한 수준의 무장을 이루었소. 독일 국민들이여, 무기를 드시오!” 위험 상황을 감지한 프랑스도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 전쟁 위험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4국 정상회담을 제안하여 뮌헨회담이 성사되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달라디에와 체임벌린이 돌파구를 찾기로 한 것이다. 각국 여론은 한숨 돌리는 분위기였다. 최악 상황에 몰렸다가 막판에 합의를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9월 29일과 30일 양일간 열린 뮌헨회담은 실상 히틀러의 요구 사항을 거의 전부 수용한 셈이다. 수데텐란트를 분리하여 독일에 합병하고, 그 대가로 히틀러는 영국과 독일 사이의 불가침조약을 제안하였다. 어쨌든 전쟁은 피하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한 체임벌린은 뮌헨회담 협정서를 높이 들어 보이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런던에 돌아온 체임벌린은 다우닝가의 외무부 건물 발코니에서 군중에게 “여러분, 이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편히 주무셔도 좋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서 레옹 블룸은 사회당 기관지 ‘민중(Le populaire)’에 이런 글을 썼다. “달라디에와 체임벌린의 공헌을 평가절하하는 사람은 프랑스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전쟁을 피하게 되었다. 파괴 위험도 사라졌다. 우리 모두 일과 단잠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가을 햇볕을 즐길 수 있으리라.”

 
1938년 뮌헨회담이 열렸던 히틀러 집무실의 현재 모습. 당시 벽난로와 천장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위키피디아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열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1914~1918년의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는 병사 130만명이 전사했고, 110만명이 평생 불구로 남았다. 경제적 피해 또한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다. 1차대전 참전 용사 대부분 그들이 겪은 무시무시한 전쟁이 ‘마지막의 마지막 전쟁(la der des ders)’이어야 하며,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서 ‘뮌헨 정신’을 찬미했다. 온통 평화주의가 대세였다. 뮌헨회담 협상안은 프랑스 의회에서 찬성 535표 대 반대 75표로 가결되었다(반대표 75표 중 73표는 모스크바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공산당 의원들 표였다).

사실 평화를 찬미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평화주의 그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반대로 조그마한 갈등이라도 모두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위험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다만 평화를 지키고자 한다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사탕 발린 평화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멍청한 인간이 되어서도 안 되고, 적의 위협적 언사에 바로 굴복하고 양보만 하는 천치 같은 인간이 되어서도 안 된다. 불행히도 뮌헨회담 전후한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보인 외교 행태에서 그런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두 나라 국민은 당장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파시즘 독재에 양보하는 것이 과연 항구적 평화를 보장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숙고하지 못했다. 1938년 8월, 히틀러가 무장을 계속 강화하는 데 놀란 달라디에가 주 40시간 노동법을 완화해서 군수 공장의 생산을 늘리자고 제안했으나 공산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40시간 준수’는 평화주의와 동의어가 되었다. 반면 우파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나치 독일보다도 소련 공산주의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두 나라가 모두 약해졌을 때 소련이 쳐들어올 거라고 믿었다. 즉 좌파의 안이한 평화주의와 우파의 근시안적 정략이 뮌헨 조약을 낳은 것이다.

뮌헨 조약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뮌헨 조약 체결 이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결과적으로 뮌헨 조약은 침략의 초대장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뮌헨이라는 말은 치명적 전쟁을 불러온 나약한 평화주의, 적의 속임수에 멍청하게 넘어가는 전략적 실수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평화를 위해 끝까지 노력하되, 그러기 위해서도 최후에는 적을 분쇄할 수 있는 강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게 뮌헨회담의 교훈이다.

지식인들의 반응

뮌헨회담 전후한 미묘하고도 어려운 상황에서 프랑스 지식인들의 태도도 둘로 나뉘었다. 로맹 롤랑, 폴 랑주뱅 같은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의 전신을 달라디에 총리에게 보냈다. 그러자 철학자 알랭과 소설가 장 지오노는 이들의 의견에 반대하여, 프랑스 대다수 국민은 전쟁의 가공할 위험을 우려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모든 창의적 방법을 동원하여 체코의 중립을 달성하고 전쟁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의 전신을 보냈다. 작가 로제 마르탱 뒤 가르는 앙드레 지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살보다는 ‘집단적 불명예’가 차라리 낫다고 솔직히 썼다. 이에 대해서는 처칠 총리가 한 말이 대답이 될 것 같다. 체임벌린이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을 결정한 직후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전쟁과 불명예 중 선택할 수 있었다. 당신은 불명예를 선택했고, 그래서 전쟁도 치르게 될 것이다.” 뮌헨회담 직전 로망 롤랑이 한 말도 참고가 될 것 같다. “평화는 그것을 원하고 지키려는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