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 논설위원 한국에서 영어는 예제없이 스트레스 요인이다. “우리 땐 학창 시절 외국 연수를 한 사람도 별로 없었다. 영어 회화가 부족한 사람은 입부해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현장에서 갈고닦았다. 발음 안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건 콘텐트와 그걸 풀어나가는 논리다.” 김성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북미국장 시절 들려준 얘기다. 외교부에선 “외국 손님이 방문하면 배석자를 두지 않는 선배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영어 실력이 들통날까 봐 그랬던 것”이란 얘기도 전해 온다. 다 오래전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영어 통역관 출신인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우리 외교관들의 영어 실력을 지적했다고 한다. 한국의 국격, 국력에 못 미친다는 질타에 따라 외교부가 어학평가와 교육제도 개편에 착수했다는 보도다. “국익이 맞붙는 현장인 외교부에서 당연히 했어야 할 지적”이라는 호응도 있지만, “장관의 특기인 영어만 강조한 것” “판문점 선언의 종전선언 부분을 북한 측 영문 번역본에 맞춰 번역한 것부터 해명하라”는 쓴소리도 나온다. 지난 14일 일본 외무성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고노 다로 외상이 ‘일본 외무대신의 자질로 영어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회담의 모두발언을 영어로 진행하고 있는 고노 외상과 언론의 신경전 여파였다. 고노 외상은 미 하원에서 인턴생활도 오래 했다. 한국과 일본 역사상 영어 실력이 가장 뛰어난 장관이 동시에 자리에 앉아 있는 셈이다.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두 사람은 과거 양국 외교장관들보다 친밀하다는 게 외교가의 전언이다. 막힘없는 언어는 외교의 생산성을 높인다. 상대국과의 외교 최전선에 가 있는 재외 공관장은 더할 나위 없다. 직업 외교관 출신이 아닌, 대통령이 특별히 임명한 특임공관장들은 미·중·일·러 등 이른바 4강 대사를 비롯해 주요국 공관에 나가 있다. 이 중엔 현지어는 물론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힘겨운 대사들이 있다. 통역을 낀 외교의 한계는 크다. 외교관이 국력의 후광을 받는 강대국들도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주일 대사 시절, 원어민 수준의 일본어로 아키히토 일왕 내외 등 일본 고위층과도 교분을 쌓았다. 정권 핵심에 있는 인사라면 어학 실력이 부족해도 대접은 받지만, 이도 저도 아니면 그야말로 ‘혼밥’ 신세다. 강 장관이 외교관들의 영어 실력이 국격에 못 미친다고 질타할 때 많은 외교관이 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중요한 영어 시험(제2외국어 포함)을 지난번 특임공관장 선발 때는 왜 빼버렸을까. 김수정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분수대] 영어가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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