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볼커, 살해 위협에도 금리 20%로 인상… 3년 만에 인플레 잡았다

bindol 2022. 5. 4. 04:36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33] ‘인플레 파이터’ 폴 볼커 1979~87년 美연준 의장

입력 2022.04.19 00:20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주된 임무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둘째는 경기 부양으로 일자리를 창출해 실업률을 낮추는 것이다. 하지만 두 임무는 곧잘 상충하기도 한다.

정치가는 경기 부양을 원하고 연준 의장은 인플레이션을 막으려 하다 보면 둘은 곧잘 부딪치곤 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선거 유세 당시부터 긴축 정책을 펴는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을 비판했다. 그는 옐런이 제때 금리를 내리지 않아 경제를 왜곡했다고 비판하면서 자기가 당선되면 제일 먼저 자를 사람이라고 공언했다. 이후 트럼프는 직접 해임하기보다는 후임자를 자기 사람으로 바꾸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2017년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제롬 파월 연준 이사를 연준 의장으로 지명함에 따라 재닛 옐런은 39년 만에 연임에 실패한 연준 의장이 되었다. 그 뒤 트럼프는 직간접으로 파월 의장에게 경기 부양 압력을 넣었다. 파월은 2020년 2월 팬데믹 사태를 맞자 과감한 금리 인하와 화끈한 양적 완화로 트럼프의 기대에 부응했다. 연준이 어찌나 돈을 많이 찍어냈는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불과 14년 만에 연준의 통화 발행액은 무려 10배가 넘는 9조달러에 육박했다. 여기에 더해 미중 무역 전쟁에 따른 공급망 붕괴와 러·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가, 곡물, 원자재 가격이 치솟아 물가 전망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1979년 지미 카터 정부 때 연준 의장이 된 폴 볼커는 1981년 로널드 레이건 정부 출범 이후에도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이어갔다. 그는 인플레이션이 14.8%까지 치솟자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렸다. 볼커를 그대로 두면 대통령 연임은 어렵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레이건은 개입하지 않았다. 이후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했고 미국 경제가 되살아나는 계기가 됐다. 사진은 1981년 미 재무부 청사 앞에서 레이건(왼쪽) 대통령과 볼커(오른쪽) 연준 의장이 함께한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장기불황은 안 된다” 결단과 실행

이런 일이 닉슨 대통령 때도 있었다. 재선을 앞둔 닉슨 대통령은 연준의 독립성을 외치는 윌리엄 마틴 연준 의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틴은 “미국 중앙은행의 임무는 파티가 한창 달아오를 때 그릇을 치우는 일”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인물이다. 닉슨은 연준 의장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히고 싶어 그의 경제 보좌관 아서 번스를 1969년 연준 의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과도한 유동성이 문제되던 상황임에도 닉슨은 재선을 위해 번스 의장에게 경기 부양을 위한 통화 팽창 정책을 요구했다. 연준의 통화 정책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닉슨은 이듬해 재선에 성공했다.

1971년 8월 닉슨 쇼크로 금과 고리가 끊어진 달러는 마음만 먹으면 양껏 발행할 수 있었다. 번스 연준 의장은 물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긴축 정책을 쓰지 않고 통화 팽창 정책을 지속하려니 인플레이션 수치를 가능한 한 낮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연준 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물가지수에서 변동성이 큰 식음료와 유가를 제외해 탄생한 게 ‘근원 인플레이션 지수’다. 이후 근원 인플레이션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달러는 무제한 발행되었다. 게다가 4차례 중동 전쟁으로 1973년 1차 석유 파동이 들이닥쳤다. 번스 연준 의장 재임 기간인 1970~1978년 9년 동안 평균 물가 상승률은 9%였다.

1979년 2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 미국의 인플레이션율이 두 자릿수로 치솟았다. 1979년 미국 인플레이션율은 13.3%나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준의 해결사로 등장한 인물이 폴 볼커였다. 1979년 8월에 취임한 폴 볼커는 긴축을 통해 인플레이션과 전쟁한다고 선언했다. 긴축 정책을 쓰면 경기 침체가 심해져 대중과 정치인들이 반발하게 마련이다. 볼커는 앞뒤 안 가리고 인플레이션과 싸우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 6일 기준금리를 11.5%에서 15.5%로 4%포인트나 올리는 조치를 단행했다. 당시 언론은 이를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 불렀다. 그러자 모기지 금리는 18%, 은행 금리는 20% 가까이 뛰어올랐다. 주식과 집값이 폭락했다. 기업들의 파산이 잇따랐고, 실업자가 폭증했다.

폴 볼커는 1927년 뉴저지에서 독일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에게 소신과 검약의 신조를 물려받았다. 볼커는 프린스턴대 우드로 윌슨 스쿨을 수석 졸업하며 졸업 논문에서 2차 대전 이후 연준이 인플레이션 관리에 실패한 이유를 분석했다. 당시 유대인들이 직장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볼커는 수석 졸업생이라 다행히 연준의 인턴 자리를 구해 조사 보조원으로 일할 수 있었다. 그 뒤 하버드대 행정대학원 정치경제학 석사를 거쳐 런던정경대학에서 수학한 볼커는 1952년 연준에 통화량 분석 담당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이후 1957년 급여가 많은 체이스맨해튼 은행 이코노미스트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 1962년에 재무부 금융분석국장으로 등용되었다가 1965년에 체이스맨해튼 부행장으로 복귀했다. 이렇게 연준과 재무부, 민간은행을 섭렵하던 볼커는 1971년에 재무부 국제 통화 담당 차관으로 발탁되어 닉슨이 그해 8월 15일 달러의 금 태환 중지를 발표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써 달러는 금과 고리가 끊어지고 전적으로 미국의 신용에 의존하는 신용화폐(Fiat Money)가 되었다.

 

그 뒤 볼커는 1975년부터 4년 동안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를 거쳐 1979년 카터 대통령에게 연준 의장으로 임명받았다. 당시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무려 13%에 달했다. 국가에서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부름받은 그는 이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모든 사람과 싸워야 하는 운명임을 직감했다.

카터도 처음에는 인플레이션 억제 캠페인을 벌였으나 시중 금리가 20%까지 올라가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고금리가 경기를 악화시켜 유권자 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카터는 연준의 독립성을 지켜주기 위해 볼커의 정책에 개입하지 않았다. 1980년 가을 대선에서 카터는 ‘신자유주의와 감세 정책’을 들고나온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결정적 패인 중 하나가 볼커의 고금리 정책이었다.

이후 볼커는 더욱 독하게 긴축 정책을 밀어붙였다. 1981년 6월 인플레이션이 14.8%까지 치솟자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렸다. 무서운 결단이었다. 레이건 대통령도 고금리 정책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미국 경제가 장기 불황에서 빠져나오려면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막료들이 볼커 연준 의장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카터처럼 연임에 실패한다는 경고를 쏟아냈지만, 레이건은 우리가 연준을 두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하며 개입하지 않았다.

워싱턴DC의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이 건물은 1937년 준공됐다. /위키피디아

신변 안전 위해 권총 차고 근무

볼커에 대한 국민의 원성은 커갔다. 은행 금리가 21.5%까지 치솟는 과정에서 경기 침체로 많은 회사가 파산하며 실업률이 10%로 치솟아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을 잡지 않고서는 미국 경제는 장래가 없다는 것이 볼커의 생각이었다. 빚더미에 앉게 된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워싱턴으로 상경했다. 이들은 도시 한복판을 행진하고 연준 건물을 봉쇄하며 볼커의 퇴진을 요구했다. 키가 2m가 넘는 볼커는 권총을 차고 다녀야 할 정도로 온갖 시위와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고금리로 인한 고통은 1981년까지 3년이나 지속되었다.

1981년 중반 들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금 이자가 높으니 돈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은행 우대 금리 21.5%와 그 무렵 인플레이션 14.5% 차이만 해도 컸다. 시중 유동성이 줄어드니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했다. 1980년 6월 14.8%까지 올라갔던 인플레이션율이 1981년 9%로 꺾였다. 1982년에는 목표치 4%에 도달하여, 볼커가 긴축을 풀자 경제는 힘차게 살아났다. 이듬해에는 경제가 살아나면서도 인플레이션은 2.4%까지 떨어졌다. 이로써 볼커는 밀턴 프리드먼이 주장한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라는 명제를 대중 뇌리에 심는 데 성공했다.

폴 볼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하던 2009~2011년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대응 타이밍 놓친 연준] 작년엔 “일시적 인플레” 올해는 “총력 다해 진화”… 바이든 지지율도 추락

지난주 미국 노동부는 3월 소비자물가가 전년 대비 8.5% 올랐다고 발표했다. 1981년 12월 이후 40년 3개월 만에 가장 큰 상승 폭이다. 자칫 잘못하면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을 맞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전 세계를 짓누르며 글로벌 긴축 공포에 휩싸였다.

사실 연준은 1년 전만 해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더라도 일시적 현상일 것이라고 했다. 일시적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평균 물가 목표제’(물가 상승률을 평균한 수치가 2%를 넘지 않으면 금리를 올리지 않는 것)를 도입해 대응하겠다고 했다. 또 인플레이션이 본격적으로 발생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수단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연준은 말을 바꾸어, 인플레이션의 불확실성이 커져 총력을 다해 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한다. 인플레이션 대응에 실기한 것이다. 뒤늦게 온순한 비둘기에서 공격적인 매로 변한 것이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이 42%로 폭락했다. 당장 11월 중간선거에 빨간불이 커졌다. 성장을 못 하는 건 국민이 용서해도 물가를 못 잡으면 용서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