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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선자의 쌀밥, 엄마의 기도

bindol 2022. 5. 27. 05:00

[동서남북] 선자의 쌀밥, 엄마의 기도

히어로도 액션도 없는데 대작 영화·예술이 된 이유
“자식에게 더 나은 기회 주려 고난 이겨낸 엄마가 있다”

입력 2022.05.27 03:00
 
 

“한국 진해에서 태어나 16세에 일본으로 건너온 ‘식민지의 여자’(어머니)는 규슈 구마모토 땅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괴롭거나 슬프거나 몸이 고단할 때, 항상 기도를 했다.”

어머니는 1950년 구마모토에서 폐품 수집상을 하며 아들을 낳았다. 억척스럽게 자식을 키웠다. 재일 한국인 최초의 도쿄대 정교수가 된 아들 강상중은 2010년 펴낸 책 ‘어머니’에서 말한다. “이치를 알고 합리적인 언어를 구별한다는 나, 혹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잃은 것. 그것은 어머니가 늘 붙잡고 있었던 ‘기도의 세계’였다.”

강상중의 ‘어머니’를 떠올린 것은 드라마 ‘파친코’에서 곧 떠날 딸 ‘선자’를 위해 쌀밥을 준비하던 ‘엄마’를 봤을 때였다. 엄마는 쌀장수에게 “더도 말고 두홉이면 됩니더” 사정한다. “우리 딸내미 쪼매 있다가 신랑 따라 일본 갑니더. 쌀맛이라도 뵈 주고 싶습니더….” 한 톨도 안 흘리려 조심스럽게 쌀을 씻고 불을 지펴 밥을 짓는다. 카메라는 엄마를 천천히 비춘다. 그 쌀밥이 엄마의 간절한 기도였다면, 딸의 기도는 그 밥을 눈물과 함께 꾹꾹 삼키는 것이었다.

고난 앞에서 사람은 유한함을 절감한다. 그럴 때 어머니는 자식의, 또 자식은 어머니의 기도가 된다. 발레리나 김지영에게 기도의 순간은 1996년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갑자기 찾아왔다. 네덜란드와 한국 국립발레단 수석을 지낸 당대 최고의 발레리나. 하지만 그땐 그저 늦둥이 막내딸이었다. 딸이 바가노바 발레학교 졸업 공연 무대에 오르던 밤, 객석의 엄마가 ‘툭’ 앞으로 쓰러졌다. 심장마비였다. “공연 전날 밤 ‘지영아, 엄마 방에서 같이 자자’ 하시는데 사춘기 딸은 ‘싫어!’ 했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사망했다’는 러시아말이 허공을 맴돌았다. 영안실 흰 천에 덮인 엄마 발을 잡고 김지영은 다짐했다. ‘엄마, 나 계속 춤출게. 계속 무대에 설게.’ 그 다짐은 무대에 오를 때마다 되뇌는 막내딸의 기도가 되었다.

 

김용화 감독에겐 영화 ‘신과 함께’가 엄마에게 바치는 기도였다. 영화 속 숨진 소방관은 저승사자에게 “어머니께 ‘잘못했어요’ 말하도록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김 감독은 “그 대사, 내가 평생 가슴에 품어온 말”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여러 해 중환자실에 계시다 저 스물두 살 때 돌아가셨어요. 저도 영화 속 아들처럼 같이 죽어버릴까 나쁜 마음 먹기도 했고요.” 슬픔과 분노가 사그라들 때까지 운전기사며 채석장 막노동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늦깎이 대학 졸업 뒤 영화감독의 길로 들어섰다. “신(神)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하잖아요. 다시 뵙고 싶었어요. 꼭 용서를 빌고 싶었어요.”

뮤지컬 배우 최정원에겐 무대가 기도였다. 어머니는 함바집을 하며 온갖 고생으로 딸을 키웠다. 고생이 병이 돼 무릎 연골이 다 닳았다. 평생 구부정한 다리를 펴지 못했다. 칠순이 넘어 연골 수술을 해 드렸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정원아, 내 다리가 펴졌어’ 하셨어요. 가족이 다 껴안고 엉엉 울었어요.” 영매사 ‘오다 메’ 역을 맡았던 무대 위 최정원은 엄마처럼 처음엔 구부정하게 걷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다리를 폈다. ‘엄마처럼 안 살겠다’던 딸은 무대 위에서 그 엄마가 됐다.

‘파친코’의 총괄 제작자 수 휴는 “모든 가정에는 자식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려 고난을 이겨낸 여성들, 저마다의 ‘선자’가 있다”고 했다. 수퍼 히어로 액션도 없는 대작이 가능했던 이유를 묻는 질문엔 “그 어머니들이 진정한 히어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쩌면 우리 어머니들의 수퍼 파워는 기도였다. 그리고 못난 자식들에겐, 어머니가 곧 삶을 버틸 힘을 주는 기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