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170> 고산 윤선도가 기장에서 유배 살 때 읊은 시
헤어지려니 오직 천 갈래 눈물만이 흘러
- 조해훈 시인·고전인문학자
- 臨分惟有千行淚·임분유유천행루
네 뜻을 따르면 새로운 길 얼마나 많은 산이 막을 것이며(若命新阡隔幾山·약명신천격기산)/ 세파를 따르자니 얼굴 붉어지려는데 어찌하겠는가?(隨波其奈赧生顔·수파기내난생안)/ 헤어지려니 오직 천 갈래 눈물만이 흘러(臨分惟有千行淚·임분유유천행루)/ 너의 옷자락에 뿌려져 점점이 얼룩지네.(灑爾衣裾點點斑·쇄이의거점점반)
내 말은 쉬지 않고 달리고 네 말은 느리지만(我馬騑騑汝馬遲·아마비비여마지)/ 이 길을 어찌 차마 따라오지 말라고 하겠느냐?(此行那忍勿追隨·차행나인물추수)/ 가장 무정한 것은 가을의 해이니(無情最是秋天日·무정최시추천일)/ 헤어지는 사람을 위해 잠시도 머물러주지 않네.(不爲離人駐少時·불위리인주소시)
위 시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贈別少弟’(증별소제·아우와 헤어지며 지어 주다) 1·2수로, 그의 문집인 ‘孤山先生遺稿(고산선생유고)’에 수록돼 있다.
윤선도가 부산 기장 황학대 일대에서 1618년 11월부터 1623년 3월까지 4년 4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오우가’ ‘어부사시사’를 짓고, 송강 정철·노계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이다. 서른 살에 예조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는 내용을 상소했다가 이른바 ‘괘씸죄’로 함경도 경원에서 2년간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래도 성이 차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기장으로 이배됐다. 평생 세 차례 유배되고 두 차례나 이배되는 불운과 시련을 겪었다. 가장 긴 귀양살이를 한 곳이 기장이다. 그가 기장에 온 지 3년 뒤인 1621년 8월 이복동생 윤선양이 찾아왔다. 만남 뒤 떠나보내며 애끓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가 아우를 배웅한 곳이 삼성대이다. 선양은 윤선도에게 속전(贖錢·돈을 주고 유배에서 벗어남)을 제안했다. 윤선도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두 수의 시에는 동생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형의 마음이 애절하게 나타나 있다. 먼 길이니 서둘러 떠나야 한다는 마음에 윤선도의 말은 서두르지만,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동생의 말은 오히려 더디다. 그런 내용이 위 시에 담겨 있다. 필자의 지인이 도보여행을 하면서 이 구간을 지나다 연락해왔다. 필자가 윤선도의 기장 유배에 대해 언급했던 글을 읽었다는 것이다.
네 뜻을 따르면 새로운 길 얼마나 많은 산이 막을 것이며(若命新阡隔幾山·약명신천격기산)/ 세파를 따르자니 얼굴 붉어지려는데 어찌하겠는가?(隨波其奈赧生顔·수파기내난생안)/ 헤어지려니 오직 천 갈래 눈물만이 흘러(臨分惟有千行淚·임분유유천행루)/ 너의 옷자락에 뿌려져 점점이 얼룩지네.(灑爾衣裾點點斑·쇄이의거점점반)
내 말은 쉬지 않고 달리고 네 말은 느리지만(我馬騑騑汝馬遲·아마비비여마지)/ 이 길을 어찌 차마 따라오지 말라고 하겠느냐?(此行那忍勿追隨·차행나인물추수)/ 가장 무정한 것은 가을의 해이니(無情最是秋天日·무정최시추천일)/ 헤어지는 사람을 위해 잠시도 머물러주지 않네.(不爲離人駐少時·불위리인주소시)
위 시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贈別少弟’(증별소제·아우와 헤어지며 지어 주다) 1·2수로, 그의 문집인 ‘孤山先生遺稿(고산선생유고)’에 수록돼 있다.
윤선도가 부산 기장 황학대 일대에서 1618년 11월부터 1623년 3월까지 4년 4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오우가’ ‘어부사시사’를 짓고, 송강 정철·노계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이다. 서른 살에 예조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는 내용을 상소했다가 이른바 ‘괘씸죄’로 함경도 경원에서 2년간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래도 성이 차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기장으로 이배됐다. 평생 세 차례 유배되고 두 차례나 이배되는 불운과 시련을 겪었다. 가장 긴 귀양살이를 한 곳이 기장이다. 그가 기장에 온 지 3년 뒤인 1621년 8월 이복동생 윤선양이 찾아왔다. 만남 뒤 떠나보내며 애끓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가 아우를 배웅한 곳이 삼성대이다. 선양은 윤선도에게 속전(贖錢·돈을 주고 유배에서 벗어남)을 제안했다. 윤선도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두 수의 시에는 동생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형의 마음이 애절하게 나타나 있다. 먼 길이니 서둘러 떠나야 한다는 마음에 윤선도의 말은 서두르지만,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동생의 말은 오히려 더디다. 그런 내용이 위 시에 담겨 있다. 필자의 지인이 도보여행을 하면서 이 구간을 지나다 연락해왔다. 필자가 윤선도의 기장 유배에 대해 언급했던 글을 읽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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