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이질적' 유전자
입력 2022.06.03 00:34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부모는 아기를 구하기 위해 왜 달려드는 기차에 몸을 던질까. 미어캣은 포식자에 노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왜 무리를 위해 경고음을 날릴까. 자신의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개체의 비합리적 행위를 설명하는 이론이 '이기적 유전자론'이다. 이들이 특별히 도덕적인 존재여서가 아니다. 유전자의 전승과 확장이라는 본능적 기제가 작용할 뿐이라는 것이다. 꼭 생물 집단에만 해당하진 않는다. 정당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선당후사(先黨後私)'는 자신들의 정치 유전자를 확대하기 위한 개체 희생 전략이다.
이재명 의원의 인천 계양을 출마는 이기적 유전자론에 반하는 희귀한 사례라 할 만하다. 당의 대선 후보였던 거물이 방탄 출마라는 비난을 무시하고 나와 전체 선거를 망쳤다. 전국을 돌며 독전해야 할 총괄선대위원장이 북소리를 울리기는커녕 도리어 지원 대상이 돼 버렸다. 병사들의 사기를 높인답시고 친정(親征)을 나온 왕이 오히려 민폐가 돼 버렸달까. 선당후사가 아니라 선사후당이었다.
민주당은 유독 우월한 유전자를 자랑하는 집단이다. 김의겸 의원의 청와대 대변인 시절 "우리 유전자엔 민간인 사찰은 없다"는 말은 두고두고 회자될 '명언'이었다. 신앙에 가까운 팬덤 현상, 상대에 대한 악마화, 성추문까지 덮는 집단 문화는 순수 유전자에 대한 긍지가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다. 이런 집단에서 '이기적 유전자'가 아닌 '이기적 개체'의 부각은 뜻밖이다.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열린 1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되자 인천시 계양구 자신의 선거사무소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지방선거 패배로 이 후보는 자신만 살고 당은 죽였다는 당내 비판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결정타는 김포공항 이전론이었다. 대선판에서 폐기된 주장을 지역구 사정이 급해지자 꺼내 드는 바람에 판세에 악영향을 끼쳤다. 무리한 주장을 펼치는 과정에서 수직 이착륙기, 해저터널 같은 공상과학 수준의 아이디어가 이어졌다. 대선 때 나온 '원화 기축통화론'에 버금가는 코미디였다. 지역민이 소외된 터무니없는 주장에 같은 당 제주 후보들이 속앓이했다. 오영훈 지사 후보가 논란을 일으킨 자당 인사 대신 국민의힘에 "갈라치기 생쇼"라고 비난한 장면에선 '호부호형 못하는 홍길동'의 애잔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민주당은 지난 대선 경선 과정에서 낯 뜨거운 '적통' 논란을 벌였다. 비주류 이재명은 민주당 적자(嫡子)를 자처하는 경쟁 후보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이 의원 스스로 "혈통으로 따지면 나는 서자"라고 자조한 적도 있다. 그러나 바닥까지 갔던 삶의 경험, 싸움닭 같은 전투력, 특유의 변신 능력으로 끝내 당의 주류에 올라 대선 티켓까지 거머쥐었다. 그 과정에서 치른 비용이 만만찮았다. 생계형 좌파라는 비아냥, 끊임없는 인성 논란, 각종 사법적 시비 등이다. 당의 유전자 풀(pool)을 풍부하게 할 수도 있었을 '이질적 유전자'가 팬덤과 결합하면서 괴이한 기득권이 되고 말았다.
이 의원의 국회 입성은 민주당에 복잡한 상황을 만들었다. 당의 자성과 혁신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패배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 경기도에서의 아슬아슬한 승리가 이재명 생존을 위한 보루가 된다면 문제가 더 꼬일 수 있다. 방송인 김어준씨가 벌써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경기도에서 이겨 (참패가 아니라) 반반 느낌이 난다." 이제 방탄 출마 대신 방탄 국회로 중도층의 반감을 살지 모른다는 우려는 무시하기 힘들다. 민주당이 보여준 '검수완박'의 완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이 의원의 시나리오였던 8월 당권 도전은 일단 쉽지 않아 보인다. 당장은 자생당사(自生黨死)라는 비난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밖엔 없다. 그러나 결국엔 차기 대선에 재도전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잡초 혹은 불사조 같은 그의 이력이 이런 관측에 설득력을 더한다. 그를 다시 부른 것은 "이재명이어서 이만큼이라도 했다"는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대선 패배 논리였다. 하지만 실은 "이재명이어서 이만큼밖에 못했다"는 '못싸졌'(못 싸워서 졌다)은 아니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 후보가 다시 등판한다면 보수가 별로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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