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부부싸움은 말 대신 문자로”
코흘리개 시절 친구들끼리 부모님 얘기를 하다보면 공통점이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싸우실 때는 꼭 일본말을 쓰신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또래의 부모님들은 대개 1920~1930년대 태어나신 분들이어서 일본어 소통이 웬만큼 되셨다. 어지간한 살림은 방 한두개에 갇혀 밀착된 생활이 불가피했던 때라 자식들 귀에 민망한 말싸움이 필요하면 ‘외국어’를 동원하신 셈이다. 요즘으로 치면 엄마 아빠만의 ‘카톡 대화방’으로 피신하신 것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부부싸움을 위한 소도(蘇塗)는 둘만의 채팅방이다. 은밀하게 부딪히기도 하고 화해도 할 수 있다. 내색하기 곤란한 연로한 부모님을 모셨거나 혹은 어린 자식과 부대끼며 살다보면 이런 사이버 공간은 꼭 필요하다. 미국 대통령 부부도 사정이 비슷했던 것 같다. 퍼스트 레이디 질 바이든이 “남편과 싸울 일이 있으면 말이 아닌 문자로만 한다”고 인터뷰했다. 항상 곁에 있는 경호원들 때문이라고 했다.
▶영어권에서는 SNS와 문자를 버무린 합성어가 많다. 싸우다는 뜻의 ‘파이트’에 문자 교환이란 뜻의 ‘텍스팅’을 보태서 ‘펙스팅’이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2008년에 이미 신조어 사전에 등장했다. 펙스팅은 상호 감정이 격앙되는 것을 막고, 표현을 두번 세번 가다듬고 조심스러워하게 된다고 했다. 주워 담을 겨를 없이 튀어나가는 말보다 문자 싸움이 한결 낫다는 것이다. 이른바 소통의 심사숙고 효과다.
▶반론도 있다. 문자메시지는 얼굴 표정, 몸짓 언어, 억양 같은 것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곡해하기에 딱 좋다는 것이다. 상대의 기분이 진정되는 국면인지 아니면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 같은지 헷갈릴 때도 있다. 게다가 문자는 기록으로 남는다. 말싸움은 화해 뒤에 휘발되고 말지만, 문자 싸움은 두고두고 남아서 나중에 불화의 씨앗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 그래서 남편 바이든도 “당신이 보낸 문자는 역사에 남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농반진반일 것이다. 대통령 부부의 펙스팅은 결코 사사로울 수 없는 기록물인 건 맞는다. 그래도 아내 질은 부부싸움이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되거나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막는 지혜를 동원한 셈이다. 평소에는 서로 내림말을 하다가 싸움을 할 때는 존댓말을 쓰는 부부도 있다. 유학파 부부는 영어로 싸운다. ‘교수님’ ‘국장님’ 같은 직책을 붙여 부른다는 부부도 봤다. 바이든 부부는 80세·71세다. 그 나이에도 여전히 삶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만들려 애쓰는 중이다.
/김광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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