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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bindol 2022. 6. 27. 04:05

전세

중앙일보

입력 2022.06.27 00:20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주거 형태인 전세의 뿌리는 전당(典當)이다. 약속한 기한 내에 빌린 돈이나 재화를 갚지 못하면 맡긴 담보를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다는 조건으로 이뤄지는 거래다. 기원전 15세기 메소포타미아 시대에 안티크레시스(antichresis)라는 전당이 있었다. 당시 일정 기간 노동력(아들)을 맡기고 보리 같은 식량을 빌리곤 했다.

국내에는 고려시대 중국을 통해 전당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논·밭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 해당 논·밭의 수확물을 이자로 받는 형태였다. 조선시대 이르러 전당의 담보는 가옥까지 확대됐는데 ‘가옥전당’이 지금의 전세다. 집값의 50~80%에 이르는 목돈을 집주인에게 맡기고 일정 기간 거주한 후 맡긴 목돈을 돌려받았다. 초가집이냐, 기와집이냐에 따라 전셋값 차이가 컸고 거주 기간은 100일~1년이었다.

전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는 1970년대다. 급격한 산업화로 서울에 사람이 몰렸고 집값은 급등했다. 적은 돈으로 살 곳이 필요했던 임차인과 시세차익을 노린 임대인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임차인은 집값보다 적은 돈으로 일정 기간 안정적으로 거주할 주거지를 확보했다. 월세나 거래세·보유세 같은 세금을 내지 않아 저축할 여유도 생겼다. 전세가 내 집 마련을 위한 ‘주거 사다리’로 불리는 이유다. 임대인은 무이자 대출(전세보증금)을 받아 자산(집)을 확보했다. 물론 집값이 올라 이익을 얻는다는 전제가 깔렸다.

새 정부가 첫 부동산 대책을 통해 임대차 시장 안정 방안을 내놨다. 앞으로 임대료를 직전 계약의 5% 이내로 인상한 ‘상생 집주인’은 2년 거주 요건을 채우지 않아도 양도소득세 비과세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장 반응은 시큰둥하다. 집주인이 1가구 1주택(일시적 2주택)이어야 하고, 직전 계약의 기준도 복잡해서다. 오는 8월 시작될 ‘임대차3법’ 후폭풍을 고려한 정부의 처방에도 전세 만기가 돌아오면 ‘올릴 수 있을 때 올리겠다’는 집주인이 수두룩한 이유다.

전세를 ‘갭투자’ 수단으로 치부할지, 서민의 주거 사다리로 볼지는 새 정부의 몫이다. 다만 전 정권이 26번의 부동산 대책을 쏟아내며 ‘누더기 규제’라는 오명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테다. 이미 시장은 잦은 규제로 인한 피로가 잔뜩 쌓였다. 국민은 ‘제대로 된’ 정책의 효험을 보고 싶다.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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