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금융황제가 내친 후계자, 10년간 칼 갈아 新금융황제 되다

bindol 2022. 6. 28. 06:02

금융황제가 내친 후계자, 10년간 칼 갈아 新금융황제 되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38] 美 현대 금융 두 거물 샌디 웨일과 제이미 다이먼

 

입력 2022.06.28 00:01
 
 

미국 현대 금융사에서 주목해야 할 두 사람이 있다. 샌디 웨일 전 시티그룹 회장과 제이미 다이먼 현 JP모건스탠리 회장이다. 두 사람은 16년간 동고동락한 사제지간이다. 1933년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폴란드계 유대인 웨일은 코넬대 졸업 후 월급 150달러의 리먼브러더스 견습생을 거쳐 27세 때 20만달러를 빌려 자신의 증권회사 ‘시어슨’을 창업했다. 이후 그는 부도 직전의 회사를 싼값에 인수해 과감한 정리해고와 비용 절감으로 정상화한 뒤 매각한 자금으로 새 회사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20년 동안 15회 이상의 인수·합병을 성공시켜 시어슨을 미국 2위의 증권사로 키워냈다. 그리고 이를 1981년 아멕스에 10억달러를 받고 팔아 월가를 놀라게 했다.

샌디 웨일(왼쪽)은 40대 후반에 자기 회사를 10억달러에 아멕스에 팔고, 아멕스 증권 부문 사장이 됐다. 이 때 그를 찾아온 20대 중반의 청년이 제이미 다이먼(오른쪽)이었다. 이들은 16년간 함께 일하며 굵직한 인수 합병을 성공시켰다. 웨일은 시티그룹 회장이 된 뒤 후계자로 꼽히던 다이먼을 쫓아냈다. 이를 악문 다이먼은 시티그룹을 꺾기 위해 뱅크원과 JP모건체이스의 합병을 추진했고, 2008년 금융 위기를 계기로 회사를 더욱 키워 시티그룹을 제쳤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월가를 놀라게 한 웨일의 ‘무한 M&A’

웨일이 아멕스 증권사업 부문 사장으로 일할 때 그를 찾아온 청년이 제이미 다이먼이다. 그의 본명은 제임스이지만, 제이미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956년 그리스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다이먼은 증권 브로커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영향으로 어린 나이에 자본과 금융에 눈을 떴다. 다이먼이 1982년 하버드 MBA를 마치고, 진로를 의논하기 위해 아버지의 상사인 웨일을 찾아간 것이다. 당시 25세의 다이먼은 골드만삭스 등 여러 곳으로부터 고액 연봉의 취직 제의를 받은 상태였다. 웨일은 그 자리에서 다이먼에게 자신을 도와달라면서 함께 일하자고 했다.

다이먼은 흔쾌히 웨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6년의 끈끈한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웨일은 다이먼을 자신의 비서로 채용했다. 그 뒤 다이먼은 인수·합병을 추진하는 웨일의 손발이 되었다. 1985년 웨일은 아멕스 이사회에 펀드보험 사업 부문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웨일이 아멕스를 떠날 때, 유일하게 그를 따라 나온 인물이 다이먼이었다.

웨일은 월가의 대형 은행들이 도매금융과 기업금융에 매달릴 때 소매금융으로 눈을 돌렸다. 다이먼과 함께 1986년 ‘커머셜크레디트’를 인수해 알짜 회사로 키워나가던 웨일은 ‘스미스 바니’를 자회사로 거느린 ‘프라이메리카’를 인수하고, 채권시장의 강자 ‘살로먼브러더스’를 합병해 트레블러스그룹을 이루었다. 그리고 웨일은 1998년 4월 다이먼과 함께 트레블러스그룹과 시티코프의 합병을 이끌어냈다.

1998년 4월 샌디 웨일이 주도한 시티코프와 트레블러스그룹의 합병은 세계 금융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1998년 초 ‘시티코프’ 존 리드 회장과 ‘트레블러스’그룹의 샌디 웨일 회장 간에 합병 논의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트레블러스’는 보험사와 증권사, 투자은행 업무를 하는 이른바 제2금융권이었다. 반면에 ‘시티코프’는 세계 100여 국가에 지점을 둔 제1금융권이었다. 그러나 합병은 ‘트레블러스’가 주도하여 2개월도 안 되어 성사됐다. 이로써 세계 27만 명의 직원과 2억 명의 고객을 확보한 ‘초대형 금융종합그룹’이 탄생했다. 샌디 웨일은 합병 과정에서 벌어진 존 리드 회장과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

오늘날 시티그룹을 일군 샌디 웨일의 인생은 ‘현대 미국 금융사(史)’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티그룹의 탄생은 웨일의 영향력으로 이듬해 글래스-스티걸 법안(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업무 병행 금지)을 폐기시키는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이다. 이후 ‘큰 것이 아름답다’가 금융계의 트랜드가 되었다. 이 합병에 자극받아 세계 금융업계에서 초대형 짝짓기가 줄을 이었다.

그 무렵 다이먼은 웨일의 틀림없는 후계자였다. 다이먼은 시티그룹 계열 증권사인 살로먼스미스바니의 공동 최고경영자를 맡았다. 당시 42세였다. 다이먼이 최고경영자로 발탁되자 시티그룹 후계자로 낙점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시티그룹이 완성되자 웨일과 다이먼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웨일에게는 제시카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다이먼 밑에서 일했는데 승진이 좌절되자 회사를 떠났다. 웨일은 분노했다. 이후 그는 다이먼이 관리하던 자산운용 부문을 직접 챙겼다. 그 뒤 다이먼이 맡고 있던 살로먼스미스바니가 손실을 내자 1998년 11월 다이먼을 시티그룹에서 쫓아냈다. 합병한 지 7개월 만이었다. 웨일은 가혹했다. 떠나는 다이먼이 시티그룹의 우수 직원들을 데려가지 못하도록 3년 동안 스카우트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요구했다.

 

다이슨으로 시원한 여름

 

해고 충격 다이먼, 권투까지 배워

다이먼은 이를 악물었다. 골프도 치지 않는 그가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 뒤 수많은 기업이 다이먼에게 최고경영자 자리를 제의했으나 다이먼의 목표는 하나였다. 웨일의 시티그룹을 꺾는 것이었다. 그는 시카고의 뱅크원을 택했다. 다이먼이 뱅크원을 선택했다는 뉴스에 뱅크원 주가가 20%나 올랐다. 그만큼 월가는 다이먼의 능력에 주목했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진가를 보여주었다. 적자에 허덕이던 뱅크원을 2002년 22억달러 흑자로 바꿨다. 7000여 명을 감원하는 극약 처방을 단행하면서 주가를 60% 이상 끌어올렸다. 그 뒤 그는 뱅크원과 JP모건체이스의 합병을 추진했다. 2004년 1월 JP모건체이스와 뱅크원의 합병이 성사되면서 시티그룹의 뒤를 바짝 추격하는 2위 은행이 되었다.

합병 조건을 보면 다이먼의 의도를 알 수 있다. JP모건체이스가 뱅크원을 550억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에 사들이는 대신, 다이먼은 2년 뒤인 2006년에 합병은행의 최고경영자로 내정됐다. 피흡수 은행의 최고경영자가 합병 후 최고경영자가 되는 유례없는 계약을 맺은 것이다. 제임스 다이먼은 이렇게 다시 월가로 돌아왔다.

2008년 초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미국 재무부와 연준이 파산 직전의 베어스턴스를 다이먼이 이끄는 JP모건체이스에 다급하게 넘겼다. 덕분에 JP모건체이스는 미국 5대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를 24억달러라는 헐값에 인수했다. JP모건체이스는 금융 위기의 구원투수라는 명분과 함께 연준의 자금까지 지원받으며 자사의 취약점인 주식중개업과 모기지 사업 강자인 베어스턴스를 거저먹다시피 했다.

다이먼 부활 도운 티머시 가이트너 -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를 지낸 티머시 가이트너 전 재무장관. 제이미 다이먼은 가이트너와 맺은 친분으로 영향력을 키웠다. /AP 연합뉴스

이 협상의 막후 주인공은 당시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였던 가이트너와 다이먼이었다. 앞서 둘은 뉴욕연준의 총재와 실세 이사로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다이먼은 구조조정 귀재답게 1만3000명의 베어스턴스 인력을 절반 이하로 줄였다. JP모건체이스는 2008년 9월에는 미국 최대 저축은행인 워싱턴뮤추얼을 19억달러에 인수했다. JP모건체이스는 베어스턴스와 워싱턴뮤추얼을 인수하며 단숨에 시가총액 1위를 차지했다. 반면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세계 1위였던 시티그룹은 금융 위기 이후 4위로 내려앉았다.

다이먼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가 추진했던 정책들이 번번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위기관리의 귀재’로 불리며 월가의 황제가 되었다. 그와 친한 가이트너가 2009년 오바마 행정부의 재무장관으로 발탁되면서 다이먼은 월가뿐 아니라 연준과 재무부를 막후에서 움직이는 실세가 되었다.

[다이먼의 경고] “먹구름 수준이 아니다… 허리케인이 몰려온다” 美 인플레 대응 비판

지난 6월 10일 발표된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41년 만의 최악인 8.6% 오르며 인플레이션 우려를 크게 키우고 있다. 이로써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 CEO 제이미 다이먼이 ‘경제 허리케인’이 몰려오고 있다고 한 경고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는 연초부터 미국 경제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고 경고했는데, 최근 들어 이를 허리케인으로 바꾸었다. 특히 지난 6월 1일 뉴욕의 한 금융 콘퍼런스에서 다이먼은 “지금은 날씨가 화창하고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 연준이 일을 잘 처리하고 있다고 모두가 생각한다. 그러나 그 너머에 허리케인이 몰려오고 있다”고 말해, 통화정책 관리에 실패한 연준을 정조준해 비판했다.

다이먼은 허리케인의 첫 번째 이유로 연준의 ‘양적긴축’을 꼽았다. “우리는 역사책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뭔가를 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너무 많은 유동성이 풀렸기 때문에 연준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투기를 멈추고, 집값을 내리기 위해 유동성을 줄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원자재 가격 상승을 들었다. “유가는 배럴당 150∼175달러까지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