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민족대표 33인 중 座長… 3·1운동과 동학농민운동 이끌었죠
의암 손병희
서울 강북구와 천도교중앙총부가 9월 30일까지 수유동 근현대사기념관에서 '3·1 운동을 이끈 민족 지도자, 의암 손병희' 특별전을 열어요. 손병희(1861~1922) 선생의 순국(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 100주기를 맞아 그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전시입니다. 천도교 지도자이자 교육 사업가였던 손 선생은 동학(東學)농민운동 주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3·1 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으로 활동했습니다.
요릿집에 모인 민족 대표들
"오등(吾等·우리)은 자(玆)에(이에) 아(我·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요릿집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서명한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됐어요.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3·1 운동이 첫발을 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33인 중 좌장 격 인물이 손병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장소가 요릿집이었다는 사실을 의아해하는 사람도 일부 있어요. 원래는 발표를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하려 했으나, 태화관으로 바꾼 이유는 이렇습니다. 손병희 등 민족 대표들은 나중에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선언서 발표 소식을 알게 된 학생들이 파고다공원으로 몰려들면 일본 경찰 탄압으로 (많은 사람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거사 전날 급히 장소를 바꿨다." 그렇다고 서울의 잘 알려진 강당이나 집회장으로 변경하면 일제가 눈치챌 우려가 컸죠. 결국 보안을 위해 요릿집을 택했고, 민족 대표들은 요릿집 손님으로 위장했던 겁니다. 일제는 이들이 태화관에서 거사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선언서를 발표하고 난 뒤에야 경찰을 보내 체포에 나섰습니다. 태화관이 있던 자리(인사동 태화복지재단)에는 현재 '3·1 독립선언광장'이 만들어져 있어요.
'사람이 곧 하늘' 인권 존중 사상
손병희는 충북 청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불우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의협심이 강했습니다. 열두 살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관청에 공금을 내려고 가다가 눈길에 쓰러진 사람을 도우려고 그 돈을 내어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1860년 최제우(1824~1864)가 창시한 동학이 확산하던 때였습니다. 동학은 평등사상을 내세웠죠. 손병희는 21세 때인 1882년(고종 19년) 동학에 입문했고, 2대 교주 최시형(1827~1898)을 도우며 동학의 교세 확장에 힘썼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교단 조직의 하나인 북접의 총지휘자로서 항일 구국 활동에 나섰습니다.
1898년 최시형이 붙잡혀 처형당하자 손병희는 그를 이은 동학 교주가 됐고, 이후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 뒤 개화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동학 세력 내에 있다가 친일로 방향을 튼 일진회 세력을 축출하고 1905년 동학 이름을 천도교로 바꿨죠. 이 무렵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설파해 인간 존중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그는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데 중요한 것이 인재 양성임을 깨닫고 보성학원과 동덕여자의숙(義塾) 경영권을 인수하는 등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전쟁 끝나면 세계는 민주정 될 것"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한 민족이 그들 자신의 독립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자"는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주창했습니다. 여기서 '자결'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이에요.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1910년 이후 일제 치하에 있던 조선에서도 독립운동 분위기가 높아졌습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 주도로 2·8 독립선언이 발표되기도 했죠.
이 소식을 들은 손병희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벌이며 세계 각국에 독립 청원서를 전달해 우리 민족 독립 열망을 알릴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천도교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협의해 '독립운동은 대중화해야 하며 비폭력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죠.
당시 손병희는 천도교 간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 정신을 일깨워 줘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겠소." 그가 생각하는 독립된 조국의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정이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전쟁이 끝나면 이 세상에 임금(왕)이란 것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천도교·개신교·불교 지도자들이 모여 '민족 대표 33인'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습니다. 천도교 측 인사가 운영하는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죠. 고종 황제 장례일이 3월 3일로 잡혀 있어 그 이틀 전인 3월 1일을 거사 날짜로 정했습니다.
"일본은 우리를 오래 지배하지 못한다"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손병희와 민족 대표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하지만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서 이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들불처럼 전국과 해외로 번져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죠.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DB)에 따르면 1919년 한 해 동안 국내외에서 모두 약 1800회 시위가 일어났으며 106만명 이상이 여기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체포된 손병희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건강이 악화돼 1920년 10월 보석(保釋·보증금을 받거나 보증인을 세우고 풀어주는 일)으로 출감했습니다. 1922년 5월 19일 가족과 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 손병희는 별세 직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간다. 그러나 너희들은 실망하지 말고 노력해라. 일본인들 도량으로는 도저히 우리나라를 오랫동안 먹지는 못할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서]
1919년 3·1 운동 당시 한국 독립을 선포한 선언서예요. 처음에는 건의서 형식으로 일본 정부에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하려 했지만 "건의서는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는' 민족 자결 의미가 약하기 때문에 강력한 독립 의지와 당위성을 내외에 선포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선언서 초안은 문인이자 역사학자인 최남선(1890~1957)이 작성했는데 그는 나중에 친일로 변절하는 바람에 비난을 많이 받기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