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만물상] 첫 문장

bindol 2022. 7. 15. 04:13

[만물상] 첫 문장

입력 2022.07.15 03:18
 
 

이순신의 생애를 다룬 김훈 장편 ‘칼의 노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한다. 작가는 ‘꽃이’로 할지 ‘꽃은’으로 할지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조사의 미묘한 차이를 심사숙고할 만큼 첫 문장에 정성을 들였다는 뜻이다. 많은 작가가 첫 문장 쓰기의 부담을 토로한다.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라는 벨기에 소설에 나오는 작가는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자 괄호 처리하고 두 번째 문장부터 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에서 똑같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결국 모든 문장을 괄호 처리한다. 첫 문장 빼고 시작하려다가 아무 내용 없는 소설을 쓰고 만 것이다.

▶소설 첫 문장은 작품의 주제와 분위기를 암시한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로 시작하는 카뮈의 ‘이방인’ 첫 문장은 세상과 단절된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 선언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주의를 집중시켜 독자를 붙잡아 두는 것도 첫 문장의 임무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신경숙 ‘엄마를 부탁해’)가 그런 경우다.

▶번역자도 첫 문장 번역에 소설가만큼이나 심혈을 기울인다. 톨스토이 장편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엔 번역자마다 차별화하려는 고심이 담겨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민음사),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열린책들) 등으로 표현했다. 시중에 10여 종이 나와 있는 ‘위대한 개츠비’ 번역엔 김석희·김욱동 등 유명 번역가에 인기 소설가 김영하도 가세했다. 소설 첫 문장 번역만 뽑아 독자 시각으로 품평한 사이트도 있다.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의 베스트셀러 소설 ‘파친코’ 첫 문장 원문은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이다. 2018년 나온 첫 번역본은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였다. 판권이 바뀌며 이달 말 새로 번역돼 나오는데,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첫 문장이 바뀌었다. 이민진은 “두 번역 모두 존중한다”고 했다.

 

▶소설 ‘파친코’는 식민과 전쟁의 고통을 겪고 일본에 건너간 한인 4대의 삶을 다룬다. 냉대와 차별,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을 연이어 겪지만 눈물을 흘린 뒤 그 눈물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첫 문장에 새삼 공감하게 된다. 망국, 분단, 전쟁, 한강의 기적이라는 우리나라의 근대사 자체가 ‘역사는 한국을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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