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과 위기 사이
입력 2022.07.15 00:36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금융시장이 어지러워지면서 다시 언급되는 영화가 있길래 찾아봤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소재로 한 '빅쇼트'란 작품이다. 주택시장의 거품을 간파하고 신용부도스와프(CDS)라는 공매도 파생상품에 올인해 돈을 번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이야기다. 도입부에 나온 마크 트웨인의 경구에 딱 꽂혔다. "곤경에 빠지는 건 뭘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금융상품이라면 빠삭하다는 월가 전문가들은 주택시장과 이를 기반으로 한 파생상품의 안전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주인공들은 그 착각의 뒤통수를 쳤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졌다. 위기다. 인사 문제, 배우자 리스크, 말실수, 당내 권력 투쟁 등이 이유로 꼽힌다. 문제의 저류는 따로 있다고 본다. 조심성 분실이다. 대통령과 그 주변의 지나친 자신감이 아마추어적 열정과 겹치며 난맥을 빚었다.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이야말로 위험
시스템 보좌로 무방비 노출 줄여야
윤 대통령의 특징 중 하나는 패기다. 윤 대통령은 정치 입문 선언(지난해 6월 29일) 이후 8개월여 만에 권력 최정상에 올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식은땀이 날 법한 질주였건만, 대통령의 당선 일성은 당차기만 했다. '벅찬 마음' '무한한 책임감' 같은 말은 있었지만, '두려움'이란 단어는 없었다. 즉석 즉답의 도어스테핑을 시작한 것도 이런 패기와 자신감의 발로였으리라. 생각보다 빠르고 과감했던 김건희 여사의 데뷔도 그랬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30%대로 급락했다. 대통령실은 경제 위기 대응에서 돌파구를 찾는 분위기다. 윤 대통령이 14일 오전 서울 중구 중앙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를 찾아 상담하러 온 시민들로부터 채무상환 애로 등을 청취하고 있다. [뉴스1]
학생들에게 시험을 보게 한 후 자신이 몇 등쯤 될지 예측하게 한 실험이 있다. 점수가 낮은 학생일수록 등수 기대치가 높았고, 점수 높은 학생일수록 기대치가 낮았다. 실력과 자신감이 일치하기보다 그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실험진의 이름을 따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한다. 오해 마시라. 윤 대통령 개인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게 아니다. 특수통 검사 및 검찰총장으로 보여준 능력이 의심스러웠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으리라. 다만 대통령으로서의 역량은 아직도 검증 중이다. 국가 지도자와 개별 조직 장(長)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그 성격과 범위에서 비교 불가다. '처음 해보는 대통령'으로서는 자신감보다 겸허함이 더 유용한 덕목일 수 있다.
역대 최악 비호감 대결이었던 지난 대선의 여진은 아직 진행 중이다. 대통령에 대한 반대 세력의 거부감은 유증기처럼 정치 공간을 꽉 채우고 있다. 증오에 가까운 비토 심리다. 야당의 중진 의원이 "대통령직 수행보다 김건희라는 여성의 남편직 수행에 여념이 없다"는 모욕적 언사를 소셜미디어에 버젓이 올리는 세상이다. '3000만원 명품 쇼핑' 같은 가짜뉴스는 앞으로도 판을 칠 것이다.
이런 살풍경 속에 정치 초보 대통령은 단기필마로 노출돼 있다. 매일 아침 기자들의 질문에 "글쎄…"로 시작하는 정제 안 된 답을 한다. 40년 정치 경력의 조 바이든 미 대통령도 실언하는 즉석 문답이다. 실수가 안 나오면 이상할 지경이다. 스스로 '고독한 파이터' 본성을 즐기는 건지, 보좌진들의 직무 유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심각한 시스템 붕괴다. 한 국가의 PI(President Identity) 전략이 일개 기업보다 못하다. 몇몇 기업 총수들의 소셜미디어 노출이 즉흥적인 것 같아도 실은 기업 이미지·목표·전략 등을 치밀하게 계산한 결과다. 대통령과 배우자의 노출이 호감으로 이어지기는커녕 그 반대가 되는 현상을 보좌진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기업에서 이런 일이 거듭된다면 홍보 임원의 목은 볼 것도 없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반(反)지성을 개탄했다. 지성은 멈춤이다.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이다. 잠깐 멈추고 돌아볼 때다. 출범 두 달이 넘도록 여전히 모호한 새 정권의 의제부터 가다듬었으면 한다. 거부감의 유증기를 뺄 밸브가 될 수 있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자신감은 근거부터 갖추고 발휘해도 좋다. 확실히 안다는 착각이 계속된다면 언제든 역습당한다. 월가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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