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은들 누가 비난하리오?
- 不死誰其非之·불사수기비지
나는 죽을 책임은 없으니(我無死責·아무사책)/ 죽지 않는다고 누가 비난할 것인가?(不死誰其非之·불사수기비지)/ 죽을 거라 말해놓고 죽지 않는다면(曰死而不死·왈사이불사)/ 이는 누구를 속이는 것인가?(是誰欺·시수기)/ 마침내 늙어 바라지(창) 밑에서 죽을 것이니(卒以老斃牖下·졸이노폐유하)/ 아! 그것이 슬프구나!(吁其悲·우기비)
경재 이건승(李建昇·1858~1924)이 1918년 만주에서 스스로 지은 묘지명(墓誌銘)이다. 그의 저서 ‘해경당수초(海耕堂收草)’에 실린 ‘경재거사자지(耕齋居士自誌)’에 나온다. 그가 스스로 지은 묘지(墓誌)는 행장처럼 일대기를 기록한 내용으로 별도로 있다, 이건승은 왜 자찬묘지명을 썼을까? 삶의 이력을 잠시 보겠다. 그는 양산군수를 지낸 이상학의 세 아들 중 둘째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형은 암행어사로 유명한 이건창, 아우는 학자 이건면이다. 조부는 병인양요 때 죽어서도 적을 무찌르겠다고 자결한 전 이조판서 이시원이다.
이건승은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정제두의 6세손 정원하(鄭元夏)와 함께 죽으려 했으나 뜻을 못 이뤘다. 그 뒤 나라가 치욕을 당한 건 강토가 작아서가 아니라 백성을 제대로 교육하지 않은 결과라 여겨 후진을 기르려고 강화도에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열었다. 1910년 8월 29일 강제합병이 있자 그해 10월 2일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에는 정원하가 먼저 와 있었다. 이건승은 1924년 만주에서 세상을 버렸는데 스스로 지은 묘지에서 “내가 나라를 떠나 이곳(만주)으로 온 것은 일본 놈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썼다.
옛사람은 생전에 자기 묘표(墓表)와 묘지(墓誌)를 적고, 심지어 자기를 애도하는 만시(輓詩·挽詩)를 지었다. 묘표에 운문이 첨가되면 묘비명, 묘지에 운문이 첨가되면 묘지명이라 했다. 이런 기록을 통칭 자찬묘지명 또는 자찬묘비명이라 한다. 어제 국어 교사 출신 지인이 전화해 “자찬묘지명을 지었는데 그럴듯한지 들어보라”고 했다. 필자가 “내용이 너무 길어 줄여야겠다” 하니, “줄여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다. 얼마나 거창하게 무덤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묘비명이나 묘지명은 최대한 축약해야 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묘지명에 칠언절구를 쓴 경우가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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