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권력 이긴다”...중 예술가들의 ‘시니컬 리얼리즘’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40회>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40회>
권력은 짧고 예술은 길다. 독재자가 폭력으로 사람들의 입을 잠시 막는다 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상념까지 깡그리 지울 순 없다. 머릿속 이미지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바위 틈새로 빠지는 물살처럼, 마음 밖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때론 인간의 표현욕이 식색(食色)의 욕구를 압도하고, 죽음의 공포도 물리칠 수 있다. 1989년 6월 중국공산당 정부는 톈안먼 대학살로 권력을 유지했지만, 예술가의 표현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인간사를 돌아보면, 정권은 불꽃처럼 단명하고, 기록은 산맥처럼 오래 남는다. 권력은 예술을 이길 수가 없다. 권력은 허망하고 예술은 거룩하다.
톈안먼 대학살 넉 달전 1989년 2월 ‘중국/아방가르드 전시회’
톈안먼 대학살이 자행되기 넉 달 전이었다. 1989년 2월 5일 오전 9시 베이징의 중국미술관에서는 “중국/아방가르드(China/Avant-garde) 전시회”가 개막을 선포했다. 이 전시회는 중국 전역 186명 예술가들이 창작한 300여 점의 작품이 선보이고 있었다. 개막식 직후, 긴 머리로 새우를 파는 인물이 등장하고, 관객을 향해 콘돔을 던지는 퍼포먼스가 연출되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그려진 세숫대야에 발을 씻는 행위예술도 펼쳐졌다. 엄숙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나라 중국에서 그 자체로 커다란 도발이었다.
오전 11시 10분 경, 전시장 한 켠 설치미술 “대화” 앞에 한 20대의 여인이 나타났다. 두 개의 공중전화 부스에 각각 여자와 남자의 표시가 있고, 그 사이에는 큰 거울이 배치돼 있는 묘한 작품이었다. “대화”라는 제목과는 달리 두 사람 사이의 “불통”이 묘사된 듯한 이 작품 앞에서 여인은 중간의 거울을 정조준해서 권총의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캉! 캉!” 폭발음을 내는 가짜 화약총에 불과했지만, 그 효과는 충격적이었다. 황급히 달려온 사복 경찰은 관련자를 즉시 체포하고 전시회를 긴급 폐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총을 쏜 여인은 “대화”의 설치미술가 샤오루(肖魯, 1962- )였다. 샤오루는 전시회 뒷문으로 빠져 나가서 버스에 몸을 싣고 도시를 돌다가 그날 4시 경 중국미술관으로 돌아가서 자수했다. 샤오루는 설치 예술의 개념을 충분히 소명한 후 나흘 만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샤오루의 도발로 “중국/아방가르드 전시회”는 허망하게 막을 내렸지만, 경찰 당국이 이례적으로 관용을 베풀어 예정된 폐막식까지 두 차례 전시회가 열릴 수는 있었다.
“중국/아방가르드 전시회”는 1985년 이래 중국 미술계의 “신예술 사조(思潮)”가 이룬 첫 번째 결실이었다. 1978년 12월 “개혁개방” 이후에야 중국의 예술가들은 이념의 족쇄를 벗고 독특한 개성과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들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창작의 세계를 날았다. 그들의 신사조는 “실험 미술”이라 불렸다.
중국의 미술가들은 이미 1986년 광둥성 주하이(珠海)에 모여서 새로운 작품들의 슬라이드를 함께 감상한 후, 1987년 7월 베이징에서 대규모 작품전을 열기로 계획했었다. 바로 그해 중공중앙이 “반(反)자산계급 자유화 운동”을 벌이면서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들은 계속 논의를 이어갔고, 결국 1989년 2월에야 “중국/아방가르드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중국의 통념을 깨는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 전시회가 톈안먼 대학살을 넉 달 앞두고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열렸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민주화와 자유화가 그 당시 중국의 시대정신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예술가들로선 그들의 영혼을 억누르는 교조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과의 투쟁이었다.
예술을 정치의 시녀로 삼고 작가의 예술혼 죽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르면, 예술가는 노동자·농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해야만 한다. 예술가는 사회주의 혁명에 적극적으로 기여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농부가 땅을 갈고 노동자가 기계를 만지듯 예술가는 손을 놀려 혁명정신을 고취해야 한다. 유희의 예술, 탐미적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 자기표현으로서의 예술은 부르주아 퇴폐주의라 간주된다. 예술가가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면 반혁명 분자의 낙인을 받는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을 정치의 시녀로 삼는다. 공산주의는 그렇게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고, 예술가의 예술혼을 억압한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중국공산당을 비판하는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중국 수묵화의 대가 옌정쉐(嚴正學, 1944- )는 1960-70년대 20여 년의 세월 동안 중앙선전부의 명령에 따라 삼엄한 감시 아래서 날마다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그려야만 했다. 그는 “예술가로서 남이 시키는 대로 맨날 같은 것만 그려야 했던 그 시절은 지옥 같았다”고 회상한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척박한 중국의 예술적 토양에서 새롭게 움튼 아방가르드 운동에 동참했다. 1980년대 전통 수묵화의 기법으로 추상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충격에 휩싸인 그는 공개적으로 중공 정부와의 투쟁을 이어갔다. 그 결과 20년간 열두 차례 이상 구속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1993년 구속되어 가혹한 구타를 당한 후, 그는 예술가가 감히 중국공산당 정부를 고소하는 “행위예술”을 연출했다. 다시 그는 노동 교화형에 처해졌지만, 굴하지 않고 영어(囹圄)의 몸으로 100여 점의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톈안먼 대학살을 규탄하고, 중국공산당을 비판하는 작품이 주종이었다. 감옥에서 어렵게 빼돌린 그의 작품은 정치적 탄압 아래서 잔뜩 얼어붙은 중국 미술계에 크고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대표작 “89.6!!!!”은 제목이 말해주듯 톈안먼 대학살의 광기를 고발한 작품이다. 중후한 수묵화 기법으로 표현된 검은 태양, 진물 나는 핏줄, 쇠사슬의 이미지는 중국공산당에 맞서는 그의 저항 정신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석방된 후 옌정쉐는 2007년 다시 “국가 체제 전복”의 죄명으로 구속되었다. 그 당시 그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리적 침체기를 겪었지만, 2009년 석방된 후 다시 저항적 작품 활동은 이어가고 있다.
1989년 이후 “시니컬 리얼리즘”의 대두...풍자와 해학에서 새로운 출로 찾아
톈안먼 대학살은 중국의 예술인들을 다시금 어둠의 궁지로 몰아넣었다. 다채로운 예술 실험으로 막 기지개를 켰던 예술가들은 다시 감시와 검열에 시달려야 했다. 톈안먼 대학살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작품 활동은 예술적 자살 시도와 같았다.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던 듯 태연자약 작품 활동에 몰두할 수도 없었다. 1970년대 한국의 저항시인 김지하가 말했듯, 정치적 탄압을 직면한 예술가에겐 “풍자냐, 자살이냐?”의 실존적 물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김지하 시인처럼 중국의 예술가들은 자살 대신 풍자와 해학에서 새로운 출로를 찾았다.
1989년 이후 새롭게 일어난 중국의 미술 사조는 “시니컬(cynical) 리얼리즘”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 누구도 탱크부대를 보내서 인민을 압살하는 정권에 정면으로 부딪혀 싸울 수는 없다. 다만 무지몽매한 정치권력을 비웃고, 조롱하고, 풍자할 수는 있다. 여기서 풍자란 정치권력의 검열을 피해 대중에 다가가는 은밀하고도 기발한 소통의 방법이다. 정부로선 딱히 처벌의 빌미를 찾을 수 없는데, 대중은 그 작품들 속에 숨어 있는 비판과 풍자의 코드를 읽어낼 수 있다.
1989년 이후 웨이민쥔(岳敏君, 1962- )이 찾은 예술적 출로는 “폭소(爆笑)”였다. 팝아트와 초현실주의를 결합한 듯한 그의 작품 세계는 세상의 부조리를 향한 유쾌한 조롱, 건강한 해학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정치적 의미를 과도하게 해석하지만, 웨이민쥔은 자신의 작품이 “시니컬하지도, 부조리하지도 않다”며 넌지시 한 발 물러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비정치적이라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의미를 찾는 관객은 어느 작품에서건 원하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현재 웨이민쥔은 2천여 명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베이징 동쪽 교외의 쑹좡예술구(宋莊藝術區)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989년 신예술조류의 선두주자로 1990년대 문화운동을 이끈 팡리쥔(方力鈞, 1963- ) 역시 시니컬 리얼리즘의 기수로 꼽힌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대머리 인간군상의 다양한 얼굴들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의 작품 속 대머리 인간군상은 뭔가 무료한 분위기를 뚫고 슬그머니 불량기를 드러내는 “건달의 해학(潑皮幽默)”의 상징으로 읽힌다. 그는 1992년 이후 베이징 북서쪽의 위안밍위안(圓明園) 마을에서 일군의 예술가들과 함께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여인의 잘려진 머릿단이 불에 타는 모습을 보던 광장의 17세 병사
1989년 6월 3-4일 베이징의 봄은 탱크 부대에 처참하게 짓밟혔다. 6월 3일 밤 10시경 톈안먼 광장 북쪽 창안(長安)에서 처음 울린 총성은 밤새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고궁(古宮) 주변 큰 길 콘크리트 바닥에는 총탄을 맞고 즉사한 사람들이 붉은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베이징 시내 병원 응급실마다 피투성이로 들것에 들려, 수레에 실려, 동료의 등에 업혀 부상자들이 헐떡이다 한 명씩 세상을 떠났다.
정치개혁과 자유화·민주화를 외치며 단식투쟁을 하던 톈안먼 광장의 시위대는 1989년 6월 4일 새벽 군부대의 최후통첩 앞에서 7주 동안 지켜왔던 “광장의 공화국”을 버리고 철수했다. 시위대가 모두 빠져나간 광장은 이제 군대에 맡겨졌다. 한 달 넘게 광장을 점령하고 투쟁을 이어가던 시위대는 텐트, 침구, 자전거 외에도 수많은 개인 용품을 남겨두고 떠났다. 청장(淸場)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텅 빈 광장에 남겨진 시위대의 물품들을 싹싹 쓸어 모아 불을 질렀다.
그때 불길 속으로 고철이 다 된 자전거 한 대가 휩쓸려 들어갔다. 그 자전거의 바퀴살에는 누구의 것인지, 어떤 일인지, 곱게 땋아 붉은 고무줄로 묶은 한 여인의 잘려나간 머릿단이 끼어 있었다. 불길 앞에서 군복을 입고 광장을 청소하던 17세의 어린 병사 천광(陳光, 1971- )의 시선은 바퀴살에 걸려 있던 그 머릿단에 머물러 있었다. 만성 설사에 시달리던 병약하고 섬세한 17세의 어린 병사 천광은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역사의 현장을 찍는 사진 병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재빨리 카메라를 들이댔을 땐 바퀴살에 걸려 있던 머리자락이 불길에 휩싸인 다음이었다. 그날 이후 그 머리털의 이미지는 어린 천광의 의식에서 떠나지 않았다.
잔인한 시간이 급물결로 흘러가도 기억은 암초처럼 뇌리에 박혀 있다. 기억은 기름진 의식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날마다 식물처럼 자라난다. 기억의 나무는 열매를 맺고 씨앗을 뿌려 방대한 서사(敍事)의 숲을 이룬다. 그날 천광의 뇌리에 심어진 기억의 씨앗은 그의 예술혼을 깨웠다. 밤새 멈추지 않던 총성, 매캐한 화약연기, 어지럽게 찢긴 채 나뒹구는 깃발들, 잿더미로 불태워진 시위 군중의 옷가지들·······. 그날의 모든 기억은 의식의 밑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으며, 가지를 쳤다.
1989년 가을 천광은 직접 카피한 고흐 “해바라기”의 모작으로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서 군사예술 학원에서 수학할 기회를 얻었다. 1992년에는 톈안먼 광장에서 몇 걸음 안 떨어진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에 입학했다. 이후 15년간 그는 줄곧 1989년 톈안먼의 기억을 피해 도망을 다녔음에도, 과거의 기억은 더욱 생생하고 또렷하게 그의 의식을 점령했다. 결국 신내림을 받은 무당처럼 천광은 예술혼이 이끄는 대로 큰 폭의 캔버스에 그날의 기억을 옮겨 담았다.
벌이가 빠듯한 순수 예술가로서 금지된 영토로 들어선 천광은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의 그림은 현재 중국 내에선 전시될 수도 없고, 온라인에 게시될 수도 없었다. 2014년 5월 10일 경 톈안먼 대학살 25주년을 앞두고 천광은 긴급 체포되어 구금 상태에서 한 달 넘게 보내야만 했다. 정부 당국이 어떤 법적 명분으로 그를 구금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금지된 기억을 표현한 죄 말고는 그 어떤 이유도 있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천광은 오늘도 가시밭길을 걷고 있지만, 과연 그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역사를 돌아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 대학살을 덮으려는 독재 정권의 몸부림은 비겁하고 뻔뻔하다. 대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예술가의 손길은 용감하고 당당하다. 비겁한 권력은 용감한 예술을 이길 수가 없다. 권력은 허망하고 예술은 거룩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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