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김옥균의 흔적 위에 서 있는 매국 귀족 박제순의 돌덩이 [박종인의 땅의 歷史]
315. 서울 종로구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땅의 팔자
* 유튜브 https://youtu.be/sRDASJ0W3Zo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독도서관과 정체를 숨긴 돌덩이
서울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건물 뒤편, 정독독서실 건물 앞 철책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돌에는 한자 24글자가 새겨져 있다. 뜻은 이렇다.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 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매립돼 흔적이 없고 돌만 우뚝하다. 광무4년(1900년) 겨울 평재(平齋)가 적다’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우물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한 결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 여겨져 현재와 같이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이 글을 적은 사람 ‘평재’는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었던 평재 박제순이다. 우물돌이 남아 있는 바로 이 자리는 박제순이 살던 집터다. 규모는 지금 도서관 전체 부지 면적 1만1000여 평 절반인 5672평이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는 애매한 말로 설명하느니 하지 않는 게 나았다. 박제순에 대해서 할 말이 우물물만큼 깊고 차가우니까. 박제순 돌덩이만 아니다. 정독도서관에는 눈여겨볼 만한 표석과 역사적 흔적이 숱하다. 지금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책을 접하려는 시민으로 붐비는데, 100년 전까지 이 도서관 터에는 숨 막히는 역사적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김옥균과 서재필, 그리고 박제순과 식민 시대까지 도서관 터 땅 팔자로 훑어보는 격변 근대사.
어느 여자의 청원서와 김옥균
‘저는 예전에 한성 북부 홍현(紅峴)에 거주하다가 갑신년(1884)에 국사범으로 바다 바깥 귀신이 된 전 참판 김옥균의 처이온데, 온 가족은 어육(魚肉)의 화를 당하고 재산은 몽땅 적몰당하는 변을 만났나이다.’ 1909년 1월 29일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아내 유씨가 당시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청원서를 올린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제 망부가 죄를 탕척받고 관작을 회복했으나 살 곳이 전무하오니 북부 홍현에 있는 관립고등학교가 제 집터이온즉 미망인 심정을 헤아리시어 처분하기를 천만절축하나이다.’(각사등록 근대편, 청원서2, ‘김옥균 처의 청원서’, 1909년 1월 29일)
1884년 12월 4일(이하 양력)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48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주모자들은 망명하고, 망명하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서 죽었다. 가족은 연좌해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그리고 재산은 파가저택(破家瀦澤), 집을 부수고 못을 만들어 흔적을 없애버렸다. 1894년 3월 28일 고종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4월 14일 한성 양화진에서 ‘조선왕조 최후의’ 부관참시이자 사후 능지처참을 당했다. 5월 31일 고종은 역적 처형을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에 갑오개혁정부가 서자 고종은 이듬해 1월 22일 김옥균의 관작 회복 칙령을 내렸다.(1894년 음12월 27일 ‘고종실록’)
김옥균 아내 유씨는 바로 이 칙령에 근거해 나라가 가져간 재산을 돌려달라고 대한제국 총리대신에게 청원서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적시한 옛 집터가 홍현(紅峴)이었고, 1909년 당시 그 ‘붉은 고개’에 관립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그 관립고등학교가 훗날 경기고등학교로 이어졌고, 경기고가 서울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학교 터는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정독도서관 잔디밭에는 김옥균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김옥균은 고개 아래 가회동 박규수 집에서 동료들과 모여 개화 이론을 배웠다. 박규수는 북학파 태두 연암 박지원 손자다. 함께 공부했던 홍영식, 서재필이 갑신정변을 같이 주도했다. 정변 실패 후 홍영식은 거리에서 살해당했다. 아버지인 전 영의정 홍순목은 집에서 가족을 죽이고 자살했다. 피칠갑이 된 채 방치됐던 집은 훗날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인수해 병원을 차렸다. 알렌은 정변 때 죽을 뻔한 왕비 민씨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준 의사였다. 서재필은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가족은 누구는 자살했고 누구는 살해됐고 누구는 노비가 됐다가 죽었다.
땅이 잊어버린 혁명가 서재필
서재필은 김옥균 옆집에 살았다. 그런데 서재필 흔적은 도서관 구내에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재혼 후 낳은 딸 뮤리얼 제이슨은 1950년대 정부를 상대로 토지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1956년 4월 12일 대법원은 경기고 부지 가운데 3443평을 서재필 소유로 반환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경기90년사’(경기고등학교 동창회, 1990)에 따르면 ‘정부는 예산 문제로 (반환이나) 대금 지불을 미뤘고’ 결국 경기고는 1972년 강남 이전을 결정했다.(‘경기90년사’, p55)
후배 서재필과 선배 김옥균은 그렇게 북촌 좁은 골짜기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살면서 근대화와 대(對)중국 독립 명분을 쌓았다. 그러니 정독도서관 잔디밭에 서재필 표석 또한 있어야 김옥균 표석이 완성된다.
관립학교의 설립과 박제순
1899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을 갖춘 실업인 양성을 목표로 관립 ‘중학교 관제’ 칙령을 발표했다.(1899년 4월 4일 ‘고종실록’) 그리고 이듬해 10월 현 정독도서관 자리에 관립중학교가 개교했다. 1880년대 이미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사립학교들이 설립됐지만 제국 학교는 한참 늦었고, 교과 내용 또한 1900년 3월 ‘중학교규칙’에 규정된 전문 과목은 빠져 있었다.(신편한국사 40, ‘청일전쟁과 갑오개혁-교육제도’, 국사편찬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가 사라졌다. 관립 한성고등학교로 운영되던 학교는 1911년 총독부 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다. 초대 교장은 홋카이도 교육자 오카모토 스케(岡元輔)였다.
학생이 늘어나면서 학교 부지 확장이 이슈가 된 1918년 2월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학교를 방문했다. 방문 2년 전 박제순이 죽었다. 총독부가 만든 관제 성균관 ‘경학원’ 대제학으로 있다가 죽었다. 경성 용산역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1000여 인파가 몰렸다. 자작 작위는 아들 박부양이 계승했다. 손자 박승유는 이에 반발해 일본군에 자원했다가 탈출해 광복군 활동을 하며 해방을 맞았다.(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승유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박제순 집은 지금으로 치면 정독도서관 잔디밭 가운데에서 본관 뒤편 언덕 너머까지였다. 그런데 박제순은 한일병합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은 귀족이 아닌가. 그래서 교장 오카모토도 그 생전에는 “학교가 좁아서…토지를…좀…” 따위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하세가와가 학교를 찾았을 때 집은 폐허였다. 그때 총독부 학무국장 세키야 데이사부로(關屋貞三郞)가 “저 집터를 쓰면 된다”고 총독에게 제안했다. 그리 되었다. 이후 학생들이 고지대를 깎아 저지대를 메우는 작업을 했고, 1919년 현재 규모 부지가 완성됐다.(이상 ‘경기90년사’, p120)
그 흔적이 앞에서 말한 우물돌 돌덩이다. 1990년에 발간한 ‘경기90년사’에는 이 돌을 1970년에 발견했고 정체는 박제순 집 우물돌이라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명의로 세워놓은 ‘역사적 의미’ 운운하는 안내판은 대단히 비겁하다. 있는 그대로 안내하면 되는 것이다.
김옥균 시호 받던 날
나라 잘 만들겠다고 일어섰다가 그 나라가 살해한 혁명가 김옥균은 집을 빼앗기고 집안은 박살났다. 아내 유씨 청원은 거부됐다. 대신 이듬해인 1910년 6월 29일 통감부 꼭두각시 융희제 순종은 아관파천(1896) 직후 노변 척살당하고 관직삭탈된 김홍집, 어윤중과 함께 김옥균을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라 명했다.(1910년 6월 29일 ‘순종실록’) 전광석화처럼 부관참시와 능지처참을 당하고 또 9개월 뒤 전광석화처럼 복권된 지 16년 만이었다. 한 달이 지난 1910년 7월 29일 관립한성고등학교 옛 김옥균 집터에서 황제가 내린 시호 교지를 받는 ‘연시례(延諡禮)’ 의식이 열렸다. 시호는 ‘忠達(충달)’이었다.(김윤식, ‘속음청사’14(한국사료총서 11집), 1910년 7월 27일) 또 한 달 뒤 나라가 사라졌다.
맑은 가을날 정독도서관에 가보시라. 무엇이 보이는가. 가을비 궂게 내리는 날 정독도서관에 가보시라.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그 흔적들 모두가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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