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6658]전주 서예 비엔날레

bindol 2022. 10. 3. 06:14
[이규태코너][6658]전주 서예 비엔날레 발행일 : 2005.10.07 / 여론/독자 A30 면
▲ 종이신문보기옛 전라도에는 시종(詩鐘)이라는 낭만적인 지식유희(知識遊戱)가 있었다. 경치 좋은 곳을 찾아 호롱불 받침대를 복판에 놓고 둘러앉는다. 추를 맨 끈을 받침대에 묶고 그 아래 놋쇠 양푼을 엎어 놓는다. 그 끈 중간에 성냥개비처럼 가지런히 깎은 향나무 꼬치를 끼우고 불을 붙인다. 시제(詩題)를 내걸고 향나무 꼬치가 타들어가 끈을 태워 그 추가 엎어 놓은 양푼 위에 떨어져 소리 낼 때까지 시를 지어 써 내야 한다. 시한에 쫓겨서인지 붓글씨가 들쑥날쑥하고 획에 조화가 잡히지 않아 글씨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하여, 잘못 쓴 붓글씨를 일러 “시종(詩鐘) 초서(草書) 같다”는 말까지 생겼다. 엊그제 개막한 전주 서예 비엔날레에는 23개국의 외국작가들이 출품하고 있어 한·중·일(韓中日) 한자문화권의 기예인 서예가 외국에서 어떻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 국제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암시를 주는 비엔날레다. 조선종이에 필묵으로 글씨 비슷하게 조형한다는 공통점 이외에 글씨체가 각국 알파벳 서체로도 확대되고 있다는 점과 서체의 파자(破字), 곧 데포르메가 자유분방하여 글씨를 벗어나 그림에 이르지 않는―그래서 ‘시종의 초서’만 같은 치졸미(稚拙美)가 완연했다. 따라서 서예 국제화의 조건으로 서체를 탈피하면서 전통서예의 오묘한 경지가 돋보일 때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첫째 비백(飛白)으로 불리는 여백(餘白)의 미가 뜰 것이다. 대나무 마디만을 그리고 마디 사이를 그리지 않은 여백만으로도 대나무 뻗어가는 줄기를 마음속에 그리듯이, 먹을 묻히지 않은 여백에 생각이나 아름다움을 소롯이 깃들게 하는 필법이다. 둘째 번짐 곧 휘묵(?墨)이라 하여 먹의 농담(濃淡)으로 선을 애매하게 하는 필법이다. 우리 조상들은 한 먹으로 7단계(薄-淡-淺-次-中-深-濃)의 농담을 가려 썼다던데 이 농담이 국제서예에 다양하게 도입될 것 같았다. 셋째 취운(吹雲)이라 하여 먹으로 안개 같은 퓨전 곧 어스름 효과를 내는 필법으로, 음양-생사-선악-미추(美醜) 등등 대립개념의 완충 표현이 성해질 것이다.

오두막 기둥에도 붓글씨를 써 붙이고 사는 예향의 수읍(首邑)이요 먹물 잘 먹기로 옛 중국 천지에까지 소문났던 조선종이의 고장인 전주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날레를 서예 세계화의 원동력으로 키워 나갔으면 한다.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