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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조랑말 행보

bindol 2022. 10. 28. 08:40

[이규태코너] 조랑말 행보

조선일보
입력 2003.11.24 17:01
 
 
 
 

울산 인근에 승용차 대신 조랑말을 타고 시내에 볼일을 보고 다니는 이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음주 운전으로 면허를 빼앗기자 선택한 대안인데 술 마시고 유유히 타고 간다 해도 단속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음주 단속에 대한 몽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조랑말 행보는 고속(高速)문명의 수레바퀴에 대항하는 한 마리 당랑(螳螂)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빈 통 속에 사는 고대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상류층의 삼두(三頭)마차가 달리는 아테네 거리를 빈 통을 굴리며 다니다가 이들 행보를 멈추게 해서 원로원에서 말썽을 빚었으나, 같은 나들이 행보인데 빠르고 느리다는 차이로 규제할 수 없다는 시민 여론이 디오게네스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유한계급의 이론’으로 유명한 미국 스탠포드대학의 사회과학자 소스타인 베블렌은 자동차 문화로 고속화하는 문명에 저항하여 대학에 오가는 데 노새를 타고 다녔었다. 이렇게 고속화의 소용돌이권(圈) 밖에서 유유자적하며 살다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죽어갔던 것이다.

우리 옛 선비들의 노후에 추종했던 삶의 질로 구족계(九足戒)라는 것이 있었다. 노후를 사는데 1)책 한 시렁 2)거문고 하나 3)신발 한 켤레 4)잠을 청할 베개 하나 5) 남으로 난 창 하나 6)햇볕 쬘 쪽마루 하나 7) 차 끓일 화로 하나 8)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하나 9)경치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 도합 구족(九足)이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빠르고 기가 센 말보다 느리고 둔중한 소를 선호하고 소보다 걸음이 더딘 나귀나 노새와 친근했던 것은 인생을 고속이나 양(量)으로 재지 않고 저속이나 질(質)로 쟀기 때문이다.

개화기 때까지 전승되어 온 화류회(花柳會), 곧 운동회의 종목으로 나귀 타고 달리기라는 것이 있었다. 10여마리 나귀를 타고 출발하면 가다 말다 뒤로 가다 서 있다 주저앉기도 해서 너무나 목가적(牧歌的)으로 내내 웃음을 자아내는(달리기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머무름을 겨루는) 저속(低速)문화가 남아 있었다.

중국에서 자전거를 양류이(洋驢) 곧 당나귀 아닌 양나귀라 하고 오토바이를 피류이즈(庇驢子) 곧 방귀 뀌는 나귀, 트랙터를 티에뉴(鐵牛)라 함은 고속화를 제동시키는 미래지향적 지혜가 드러나보이는 작명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음주 단속이 아니라 고속문명을 빈정대는 조랑말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