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머루포도 文明論

bindol 2022. 11. 18. 06:04

[이규태 코너] 머루포도 文明論

조선일보
입력 2002.10.31 20:33
 
 
 
 


서양 포도와 한국 머루를 교접시킨 머루포도는 이미 시판되고 있지만
새로 개발되었다는 품종인 「MBA 포도」는 그 맛이 여느 다른 서양
포도를 능가하고, 알이 작다는 종전의 약점과 서양 포도의 유약성이
보강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동서문물의 교합·절충으로 이전의
그것들보다 한결 발전된 단계를 창조했다는 것이 되며 이를 문명론에
투영시켜 보는 것도 무위하지 않을 것 같다.

우세문명이 약세문명과 부딪쳤을 때 이를 흡수해버림으로써 약세문명이
소멸되고 만다는 문명 수렴설(收斂說)이 있고 양 문명이 부딪쳤을 때
환경에 알맞게 두 문명이 절충·융합하여 이전보다 발전된 형태를
자아낸다는 비수렴설(非收斂說)이 있다. 유럽 식민정책이 전세계를
판쳤던 19세기까지는 그 수렴설이 지배했으나 20세기 들어서는 꼬리를
감추고 비수렴설이 드세져 왔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동서고금의 약세 문화권에서의 문화는 3단계로 발전해왔고 발전해간다는
비수렴설을 내세웠다. 우리나라에 적용시켜보면 개화기 이전이 1단계
전통문화시대요 개화기 이래 2단계 외래문화시대가 진행되다가 현재는
그 황금시대다. 젊은이들 모이는 거리마다 한국말 간판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아이들 R 발음을 위해 혓바닥 단절수술을 한다는 것만
보아도 외래문화는 한국문화를 삼켜버리는 공룡(恐龍)이요, 그래서
수렴설이 들어맞는 것만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지역의 기후·풍토·역사·전통 등 환경에 수천년 동안
시행착오 끝에 적자(適者)로 살아남은 것이 1단계의 전통문화요,
달라지는 세계를 대변하는 2단계의 외래문화가 그에 발전적으로
절충·융합해 나가는 것이 3단계다. 이를테면 3단계 문화로 초기
이화학당에서 페인 학당장(學堂長)이 창출해낸 조끼치마를 들수 있다.
종래의 조선치마를 입혀놓고서는 체조 등 여성의 육체해방이
불가능하다고 본 그녀는 전통치마에서 치맛말을 떼어내고 심한 활동에도
치마가 내려가지 않는 양장 패션인 조끼말을 떼어다 붙여 발전적 3단계
문화를 창출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의식주뿐 아니라
문화·학문·경영 모든 분야에서 발전적 3단계를 위해 절충이 시급한
이때 머루포도의 3단계 창출이 시사한 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