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간신열전] [254] 오죽했으면
입력 2024.10.02. 23:54
민유중(閔維重·1630~1687년)은 숙종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이다. 민유중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실권을 장악했다. 1681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둘째 딸이 숙종 계비가 되었다. 이에 그는 임금의 장인인 국구(國舅)가 되었다.
민유중은 이듬해 금위영(禁衛營-왕실 경호 부대) 창설을 주도해 금위대장을 맡았다. 국구로서 병권과 재정권을 장악한 민유중은 전권을 휘둘렀다. 숙종 9년(1683년) 5월 5일 자 ‘숙종실록’이다. 소론의 윤증(尹拯)을 조정에서 불렀으나 윤증은 자기를 찾아온 박세채(朴世采·1631~1695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갈 수 없는 이유가 셋이 있다. 남인(南人)의 원한[怨毒]을 화평하게 할 수 없는 것이 그 하나이고 삼척(三戚)의 위병(威柄-위세)을 제지(制止)할 수 없는 것이 하나이며 우옹(尤翁-송시열)의 세도(世道)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하나이다.”
삼척(三戚)이란 청풍 김씨와 광산 김씨 그리고 여흥 민씨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3년 후인 숙종 12년(1686년) 7월 6일 홍문관 부교리 이징명(李徵明·1648~1699년)이 소를 올려 외척을 경계할 것은 건의했다. 민유중과 같은 노론이었던 이징명은 장희빈 주변을 비판함과 동시에 인현왕후 집안도 함께 겨냥했다. 오죽했으면.
“외척을 경계하는 것이 억측에 가깝다 하더라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옛사람의 명백한 교훈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 곤성(坤聖-왕비)을 면계(勉戒)하고 외척을 칙려(飭勵)하여 근신하시기를 마치 후한(後漢) 명덕 황후(明德皇后)의 외가와 같이 하신다면, 국가의 행복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곤성이 혈친을 친하게 여기는[親親] 아름다운 덕이 또한 영원히 보전되어 훼손되지 않을 것입니다.”
숙종은 이징명의 간언을 “임금을 경시하고 신하를 중시하는 짓”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숙종은 더 이상 민유중을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다. 1689년 노론이 축출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이징명도 남해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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