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간신열전] [264]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그리운 까닭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입력 2024.12.11. 23:54
나라가 초비상 상황이다. 혹군(惑君) 한 사람이 저질러 놓은 난장판 대한민국을 어떻게 다시 본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을까?
옛사람들 지혜에 따르면 평시에는 정도(正道)를 따르고 비상시에는 권도(權道)를 따르는 것이다. 권도란 이전 관행이나 법률에만 구애되지 않고 눈앞의 난제를 해결해 내는 것이다. 다만 권도(權道)를 따라야 할 때는 반드시 조건이 있다. 더 많은 백성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에만 제한적으로 써야 한다.
그리고 권도를 쓸 때는 모두가 믿을 만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이 마음을 다해 따른다. 지금 겪고 있는 큰 어려움은 우리 주변에 그런 인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조선 시대 명재상 이원익(李元翼·1547~1634)만 한 인물만 있어도 우리 국민은 크게 걱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리(梧里)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다. 당색이 강하지 않은 남인 이원익은 자기 당의 주장이 강하지 않았고, 당색이 달라도 그 이유로 그 사람을 물리치지 않았다. 오직 국익을 우선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북인의 광해군이 들어서고 서인의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했을 때도 가장 먼저 정권 실세들이 영의정으로 모셔 온 사람이 바로 이원익이다. 조선 500년 역사에 드문 일이다. 1623년(인조 1년) 3월 16일 자 실록으로 들어가 보자.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선조(先朝-선조)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일국의 중망을 받았다. 혼조(광해군) 시절 폐모론이 한창일 때에 또 상소하여 효를 극진히 하는 도리를 극력 개진하였으므로 흉도들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5년 동안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 이때에 와서 다시 수규(首揆·영의정)에 제수되니 조야가 모두 서로 경하하였다.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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