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독일 통일 몇 년 후였다. 방송에 새로운 정치인의 모습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동독 출신인 그 젊은 여성은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웠고 강한 동독 억양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전공이 양자화학이란다!
대부분 홍보 대행사 대표나 중고차 딜러같이 생긴 서독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그녀의 눈은 말하는 듯했다. 본인은 여전히 참과 거짓 그리고 선과 악의 진정한 차이를 알고 있다고. 목사 딸로 동독에서 자라 교육받고 과학자로 일하던 앙겔라 메르켈이었다.
메르켈은 여성부·환경부 장관을 거쳐 2005년 드디어 첫 여성이자 첫 동독 출신 총리로 임명된다. 작지 않은 센세이션이었다. 잘살고 세련된 '베시'(서독 출신)와 가난하고 촌스러운 '오시'(동독 출신)로 구별되던 시절 동독 출신이 총리가 되다니!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하고 자란 그녀가 유럽 민주주의의 축(軸)인 독일을 리드할 수 있을까?
더구나 메르켈은 카리스마도, 감정도 없어 보이는 '지루한' 인물이었다. 독일인들이 그녀를 '무티'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유다. 독일어로 어머니는 '무터' 그리고 엄마는 '마미'다. 그렇다면 '무티'는? 엄마와 어머니의 중간 정도다. 엄마만큼 친근하지도, 어머니만큼 어렵지도 않은 어정쩡한, 바로 앙겔라 메르켈 같은 존재다.
무티 메르켈의 정책은 언제나 합리적이었다. 중도 보수인 그녀는 자본과 시장의 중요성을 이해하지만, 결국 시장도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이탈리아의
살비니, 헝가리의 오르반, 푸틴, 트럼프 그리고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전 세계가 극좌·극우 포퓰리즘으로 득실거리는 오늘날 여전히 감정과 이데올로기보다 이성과 실용주의를 주장하던 메르켈은 최근 다음 총선을 계기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루하지만 따듯한, 혁명보다는 실속 있는 사회발전을 선호하는 메르켈 스타일 정치는 이제 유럽에서조차 사라져가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