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영문학 겨우내 꽝꽝 얼었던 연못의 얼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얼음장 밑에서 부재(不在)의 삶을 살던 작은 붕어들이 물 위에 입술을 내밀고 뽀글뽀글 숨을 쉰다. 붕어들은 ‘나, 살아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위로 봄비가 떨어진다. 수면 위에 동그라미들이 무수히 그려졌다 사라지고 다시 또 그려진다. 작은 붕어들은 봄비의 풍금 소리를 들을 것이다. 건너편 산 아랫집 닭장의 수탉들은 시도 때도 없이 큰 목소리로 울어댄다. 보지 않아도 안다. 닭들은 홰를 치며 봄 하늘로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용을 쓰고 있을 것이다. 겨우 내내 죽은 숲이었던 뒷산에서 고라니들이 목을 길게 빼고 산 아래 사는 사람들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지른다. ‘여기, 우리도 있어요’라고 떠드는 것 같다. 한밤중 검은 숲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끼룩끼룩 운다. 꿩도 아니고, 소쩍새도 아니고, 뻐꾸기도 아닌 저들은 누구일까. 우는 소리가 제법 큰 걸 보면 풍채도 제법 좋을 것 같은 저 밤새들은 내게 아직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저들은 이름 없이도 존재하는 법을 안다. 너무 일찍 나온 개구리들이 개울가에 아직 채 녹지 않은 얼음 사이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다. 지난 여름 터진 초록 물감 사이로 떨어지던 작은 폭포는 아직도 제 몸뚱이에 얼음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멀리 남도에선 연지 바른 입술들을 내밀며 꽃들이 아우성이라는데, 여기 강원도 산골엔 아직 순서를 기다리는 존재들이 봄이 아니라 봄 ‘즈음’의 시간에서 잠 못 이루고 있다. 봄의 호각소리만 들리면 바로 세상 밖으로 터져나갈 듯 만물이 퉁퉁 부어오르고 있다. 삶의 향기 3/19 수많은 시간의 단위들이 있지만 가장 새롭고 기대로 가득 찬 시간은 ‘즈음’의 시간이다. 당신을 만나러 나가 당신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 설레며 기다리던 그 ‘중간’의 시간, 살아서 계속 움직이던 액체의 시간, 격정을 향해 달려가던 ‘즈음’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관습에서 벗어나는 시간이며, 또다시 뻔해질 미래도 아닌, ‘미결정’의 시간이고 유동의 시간이다. ‘박명(薄明)’ ‘어스름’ ‘여명(黎明)’의 시간들은 변화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은 ‘저 너머’로 가기 위해 퉁퉁 부어오른 시간, 잘 발효되어 다른 것으로 태어나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지금 아직도 겨울인 이 산골에서 대지의 따뜻한 날숨을 벌써 눈치채고 붕어와 이름 모를 새들과 고라니들이 잠 못 이루며 들썩이는 것은, ‘즈음’의 시간이 부채질을 하기 때문이다. ‘즈음’은 알 수 없는 희망과 꿈과 다른 미래의 시간이다.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나오는 지혜의 상징, 미네르바의 부엉이도 황혼 어스름, 즉 ‘즈음’의 시간에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즈음’이 아닌 시간은 없다. 모든 시간은 현재를 뒤로 밀어내며 미래를 앞으로 끌어당기는 어느 ‘즈음’에 있다. 그러니 아무 때나 가슴 저리는 것, 죄 아니다. 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영문학 [출처: 중앙일보] [삶의 향기] ‘즈음’의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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