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방고용노동청 안동지청에서 공익 근무중인 반병현씨. [사진 본인 제공]
'국정원에 적발당한' 스타 공익
코딩으로 무장한 별난 공무원들
영혼 있는 공익과 공무원 만나
돈 먹는 하마 정부에 경종 울리다
여기 한 공익(사회복무요원)이 있다. 안동의 일반고(경안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해 카이스트에 진학한 후 바이오및뇌공학 석사과정을 또 조기 졸업한 영재지만 고용노동부 산하 대구지방고용노동청 안동지청에서 화장실 휴지 갈기나 우편물 정리하기, 민원인 길 안내 같은 잡무를 하며 병역의무를 하고 있는 반병현(26)씨다. 스스로 얘기하듯 "취업이 그렇게 잘 된다는 인공지능 분야로 학위를 따고서 (산업체의 전문연구요원이 아니라 시급 1600원쯤 받는) 공익이 된" 드문 케이스다. 어쩌다 보니 공익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카이스트 재학 시절 총학의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총장실을 찾아 말춤을 춘은 반병현씨. [사진 유튜브 캡처]
파장이 컸다. 지난 연말 청와대에 불려갔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 회장님으로부터는 만나러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냉큼 달려가 덥석 시키는 일을 할 법도 한데 웬만한 제안은 다 거절 중이다. 전공을 살려 다른 정부 부처 업무를 돕고 싶어도 출장비 같은 금전적 보상은 고사하고 매번 겸직 허가를 받지 않으면 본업인 잡무(휴지 갈기 등) 외의 '딴짓'(개발)을 할 수 없는 현실적 장벽 탓이 크다. 여기에 "군인을 보고 싶으면 면회를 와야 하는 게 아니냐"는 식의 특유의 귀여운 허세도 한몫했다.
그런데 이 괴짜 공익을 감동시켜 지속적으로 업무협조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단한 권력자도, 부자도, 천재도 아니라 뜻밖에도 그냥 공무원이었다. 그것도 요즘 일자리 문제로 사방에서 욕을 먹는 고용노동부 소속이다. 그가 올린 글을 보고 미디어보다 먼저 연락을 해온 곳이다. 반씨는 처음엔 이메일만 주고받다 지난해 12월 3일 세종시에서 AI 기술을 활용해 데이터 혁신을 통한 고용 관련 서비스 업그레이드 업무를 하는 '고용서비스기반과' 사람들과 만났다. 그 후기를 페이스북에 이렇게 올렸다. '고용노동부엔 스타트업만큼 열정이 뛰어난 부서가 있다.'
#과고 출신 개발자 고용부 공무원
반씨는 "서로 자기 하는 일이 재밌다면서 침 튀기며 업무 자랑하는 대단한 팀이더라"며 "열정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다.
다른 부처 사무실과 달리 칸막이 없이 가운데를 비워둬 수시로 소통하는 고용노동부 고용서비스기반과 사무실. 화이트보드를 통해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적극적으로 한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과학고 출신의 김동현 서기관. 안혜리 기자
고용서비스기반과 공용책장. '파이썬'등 전문 책자가 주로 눈에 띈다. 안혜리 기자
마치 IT 스타트업처럼 대형 모니터 두 개는 기본이고 책상마다 코딩 같은 전문서적이 즐비하다. 안혜리 기자
#화이트보드로 위계 깬 과장님
박병기 과장은 "고용부는 수십조 원에 달하는 각종 사업을 운영하는데 데이터는 부실하고 고객 마인드도 워낙 떨어지다 보니 국민 동의를 얻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스스로 창피했다"고 말한다. "고용 지표가 나쁘게 나올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새로운 제도를 뚝딱 만들어내다 보니 업무는 계속 늘고 효과는 오히려 떨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걸 참기 어려웠다"고도 했다. 심지어 어떤 프로그램은 전국적으로 수혜자가 200명이 채 안 되는 것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 데이터는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예산 투입 대비 고용 효과와 같은 제대로 된 분석 하나 하기도 어려웠다. 속된 말로 "쪽팔리게 살지 말자"는 문제의식이 고용서비스기반과를 만들겠다고 뛰어다닌 동인이었다.
화이트보드는 위계를 깨는 좋은 수단이다. 왼쪽이 오은경 과장, 오른쪽이 김동현 서기관. 안혜리 기자
복장 규정도 바꿨다. 자유로운 생각을 스스럼없이 공유하기 위해 팀원들 모두 운동화에 청바지 등 원하는 대로 입고 출퇴근했다. 박병기 과장은 "위계가 확실한 공무원 조직 특성상 찍힐까 무서워 상사에게 자기 의견을 잘 얘기하지 못하는데 국장 직전 고참 과장이 먼저 나서서 위계를 무너뜨리니 생각이 다르면 다르다고 얘기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만들어졌다"고 했다. 업무에 대한 공감대가 이뤄지니 구성원 모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대로 해야겠다는 책임감으로 협업할 수 있었고, 자연어 처리 기반의 워크넷 재편 등 굵직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정부는 알바 일자리에 수십 조원을 펑펑 쓴다. 복지라는 이름으로 세금을 물 쓰듯 쓰는 어느 시장님은 최근 돈을 더 쓰고 싶다며 최근 "시립조폐청이라도 만들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 터무니없는 돈 쓰는 대신 공무원이 영혼을 갖고 일하게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 아닐까. 까칠한 공익마저 감동시킨 공무원들을 만나보고 떠올린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