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聞column

[만물상] 영국 민주주의 난맥

bindol 2019. 3. 26. 05:12

요즘 런던에 가면 관광 명물 빅벤이 멈춰 있다. 이 시계가 걸려 있는 국회의사당이 작년부터 보수 공사를 시작했다. 1800년대 중반에 개축한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너무 낡아 얼마 전부터 곳곳에 비가 새고 외벽 장식이 떨어졌다. 지금 5조원이 투입되는 리모델링이 한창이다. 그런데 언론은 '건물이 아니라 정작 건물 안에 있는 정치인이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꼬집는다.

▶사실 첫 단추부터 좀 이상했다. 2015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총선 공약으로 "EU 탈퇴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했다. 독일에 밀린다는 피해 의식, EU 분담금은 많고 이익은 적다는 불만, 아랍 난민이 대거 몰려와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이 국민의 불만을 이용해 표를 얻으려는 수법이었다. 

[만물상] 영국 민주주의 난맥

▶그래도 '설마' 했다. 하지만 막상 투표함을 열어 보니 '설마'가 '현실'이 됐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복잡한 사안을 국민투표에 부친 자체가 문제였다. 영국 국민 중 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투표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의문은 그때부터 있었다. '설마'를 '현실'로 만든 국민은 그다음부터는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 책임을 몽땅 뒤집어쓴 정치권은 이를 해결하지 못했고 영국 정치는 매일 진창이다. 2년여 걸린 탈퇴 협상안은 의회에서 번번이 부결되고 있다. 합의안·수정안이 부결됐고, 아예 합의 없이 EU에서 탈퇴하는 '노 딜' 안은 안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말이냐"는 물음엔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집권당 자중지란으로 메이 총리를 축출하려는 '쿠데타 움직임'까지 보도됐다.

▶경제는 직격탄을 맞고 있다. 파운드화 가치가 15% 떨어지고, 자산 1조파운드(약 1500조원)가 해외로 탈출했다. 기업은 프랑스·독일·네덜란드 같은 곳에 본사를 옮기고 있다. 보다 못한 국민이 거리로 나왔다. 주말 100만이 넘는 런던 시민이 "국민투표를 다시 하자"고 외쳤다. '재(再)투표'로 EU 탈퇴를 취소하자는 의회 청원 서명은 500만을 넘어 섰다.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는 '권리장전'이 나온 때가 1689년이다. 그 뒤 영국 의회는 입헌군주제와 대의민주제의 문을 앞장서서 열었다. 그랬던 이곳 의회가 요즘엔 '바보들의 집'으로 불린다. 영국도 예외는 아닌 것이 무책임한 분열 정치를 국민이 제어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난맥에 빠진다. 그 사실을 지금 다른 곳도 아닌 민주주의 본산이 보여주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25/20190325032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