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 교수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에게 매력을 못주는 건 속상한 일이다. 눈에 삼삼한 네 살 외손녀에게 인기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장된 목소리와 몸동작으로 요란한 수작을 건네도 효과가 없다. 같이 놀고 싶은 데 놀이상대로 최하위, 거의 간택을 받지 못한다. 숙녀의 인지적 용량이 커지면 인기순위의 선두가 되리라는 허세를 믿는 가족도 없는 눈치다. 왜 인기가 없을까? 경청이 문제인 듯싶다. 엄마아빠나 외할머니나 여타 가족과는 달리 다소곳이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 게 문제다. 어떤 말이고 일단 차분히 들어는 주는 이들과 다른 게 탈이다. 울거나 보채는 비언어도 중요한 의사행위인데 부실하게 경청하니 인기도 부재한 거다. 경청이 승부의 요처라는 깨우침이다. 경청(listening)은 상대의 말을 듣는(hearing) 차원, 말하는 사람에 주목하는 차원, 상대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세 개의 차원을 포함한다(『listening』, Wolvin & Coakley). 제대로 된 경청은 세 가지 차원을 모두 포함할 때 이루어진다. 경청에 대한 최초의 기념비적 연구가 1926년 미국에서 폴 랜킨에 의해 수행된 이래 경청행위는 하루 동안의 생활에서 듣기·쓰기행위 보다 훨씬 많이 하는 언어행위임이 밝혀져 왔다(우리나라에는 이런 연구가 없다). 또한 일반인, 가정주부, 비즈니스맨, 고용주, 고용인, 학생과 같이 조사대상자를 다양화한 연구들에서도 경청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행위였다. 효율적인 경청에 대한 이해와 실행이야말로 인류의 문명을 가능하게 한 언어행위를 제대로 잇는 것임을 상기하는 결과들이다. 소통카페 4/1 상대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연결하는 경청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경청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반응을 하게 하고 대화에 이르게 하는 출발점이다. 상대가 어떤 이유에서 그런 말을 하고,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는 역지사지의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우리사회가 자주 목도하는 상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경청하지 않는다는 것은 궤변일 뿐이다. 경청 자체는 상대에 대한 동의나 반대를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과 주장이 달라도 우선 상대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민주주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온 인류의 지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특히 툭하면 경청을 팽개치는 국회의원과 정당은 그 많은 특권들이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라고 주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들만 옳고 무오류라고 목청을 높이면서 상대의 말은 안중에 두지 않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경청을 무시하는 자들은 오직 입만 있고 귀도 생각도 없는 괴물과 다를 게 없다. 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 교수 [출처: 중앙일보] [김정기의 소통카페] 상대의 말 제발 좀 경청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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